지난 1일 오후 고려제강 언양 공장에선 기계 가동을 멈추고 하반기 재고 조사가 진행 중이었다. 연분홍색 재고 조사표를 들고 공장을 돌아다니는 김병섭(62) 반장의 이마엔 구슬땀이 맺혀 있다. 김 반장은 “부지런히 끝내야 야간조가 작업에 들어간다”며 걸음을 재촉했다. 옆에 있던 곽진환(61)씨도 “주문이 밀려 있어 마음이 급하다”며 웃었다.
고려제강, 평균 58.7세 정규직 일터 실험
공장 어디를 봐도 머리카락 희끗한 어르신들뿐이다. 이 공장 근로자 44명의 평균 연령은 58.7세. 강길훈 공장장이 53세로 가장 젊다. 강 공장장은 “지난해 9월 언양 공장을 정년 퇴직자 전용 생산라인으로 정비하면서 은퇴한 고참들이 새로 입사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고려제강 생산직 근로자의 정년은 만 55세. 촉탁계약을 하면 최장 3년간 더 일할 수 있다. 이것도 모자라 정년 퇴직자도 원하면 정규직으로 다시 일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퇴직자 재고용은 홍영철(61) 회장의 결단으로 이뤄졌다. 언양 공장이 2007년 중국 칭다오로 설비를 이전하자 정년 퇴직자 전용 생산라인으로 만든 것이다. 홍 회장은 “노조가 93년 항구적 무파업을 선언할 정도로 회사를 믿어 줘 가능했던 일”이라며 “재직 중인 사원에게도 희망적인 메시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공장 근로자들은 주 5~6일, 3조 3교대로 근무한다. 월 급여는 150만~180만원. 한창 때 급여에 비하면 절반 수준이다. 하지만 잔업·특근을 안 하고 업무 강도도 상대적으로 낮은 것을 감안하면 적지 않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월급과 별도로 실적에 따라 성과급도 추가로 준다.
근로자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밝았다. 허자수(55)씨는 “한창 땐 매일 12시간씩 일했다”며 끄덕 없다는 표정이다. “(퇴직하고) 쉬는 것도 한 달 하니까 지치더라고. 약수터 가는 것도 세 시간이면 충분해. 나중엔 TV만 지키고 앉아 있는 ‘리모컨맨’이 되더라니까. 지금은 얼마나 좋은지 몰라. 실력 발휘해, 건강 챙겨. 힘이 절로 나.” 3교대 근무를 하느라 오전 6시까지 출근하는 게 힘들지 않냐고 묻자 젊은이랑 달리 새벽잠이 없어 문제없단다.
고려제강은 특수선재 분야 세계 2위 업체로 지난해 44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임직원은 700명 남짓 교량·엘리베이터·크레인용 쇠밧줄이 주 생산품이다. 언양 공장에선 자동차·복사기용 선재를 만든다. 올 매출 목표는 100억원. 강 공장장은 “지난달 192t을 생산해 생산 목표(186t)를 초과했다”며 “70%를 수출하는데 지금까지 단 한 건의 클레임도 없어 세계 최고의 품질을 자부한다”고 말했다. 이어 “납기와 품질을 강조하지 않아도 알아서 일하는 분위기”라며 “노무 관리가 필요 없다”고 했다. 홍 회장도 “아직 속단하기 이르지만 생산성이 기대보다 30% 이상 높다”고 평가했다.
언양 공장은 고령자가 불편 없이 일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다. 공장 안에 의무실을 두고 월 1회 건강검진을 실시한다. 천장엔 크레인 선을 거미줄처럼 연결해 놨다. 강 공장장은 “어르신들이 무게 17~30㎏짜리 제품을 쉽게 운반하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려제강은 아직 재입사 정년을 정하지 않았다. ‘체력 닿는 데까지 일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방침만 세웠을 뿐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 이호성 이사는 “퇴직자를 대거 재고용해 성과를 거두고 있는 국내 첫 사례일 것 같다”며 “평균 정년이 57.1세에 불과해 고령화 대책이 심각한 우리나라에서 언양 공장은 훌륭한 벤치마킹 대상”이라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