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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 인터뷰]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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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구조조정의 칼자루를 쥔 이헌재 (李憲宰) 금융감독위원장은 요즘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다. 일에 치여 정신을 못차릴 지경이건만, 사방에서 원망의 소리에 시달려야 한다.

"욕을 먹어도 어쩝니까. 상황은 급하고, 누가 해도 해야 할 일인데. " 취임 3개월 만에 부실은행퇴출작전을 진두지휘하고 나선 그는 "본격적인 금융개혁은 이제 겨우 시작" 이라고 말한다.

겉으론 태연하지만 속으론 죽을 맛이다.

개혁과정에서 빚어지는 부작용뿐 아니라 온갖 압력이나 청탁이 어떠할지는 쉽게 짐작이 간다.

- 기업이나 은행 사람들 사이에 저승사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악역을 맡고 있는데 소감이 어떻습니까.

"누군들 욕먹길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방치할 수 없는 위기상황 속에 어떤 선택을 해야 합니까. 자연치유의 단계를 넘어 대수술로 환부를 도려내지 않으면 안되는 형편이 됐으니 말이에요. 개인적으론 괴롭기 짝이 없습니다."

- 원래 적성에 맞는 일 아닙니까. 야인 (野人) 시절에도 줄곧 개혁의 필요성과 그 대안들을 주장해 오지 않았습니까.

"적성에 맞는다기보다는 위기상황에 대한 감응이 남들보다 좀 예민한 편이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그동안 미뤄왔던 수많은 문제들을 일시에 해결해야 하니, 정말 어렵습니다."

- 남이 하던 것을 비판만 하다가 직접 칼자루를 잡으니 무엇이 가장 힘듭니까.

"총론에는 합의하면서도 실천을 전제로 한 각론에만 들어가면 이해가 엇갈려 갈등이 심각해집니다. 과감하게 밀어붙이자니 특혜시비가 걱정이고 천천히 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화급하고…. "

- 그래도 급하다고 너무 밀어붙이는 건 아닌가요. 특히 부실기업 퇴출과 관련해 몇년 후에 소송이라도 걸어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국제의 양정모씨도 나중에 소송을 걸어 이기지 않았습니까.

"나도 그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매사 투명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외국의 구조조정 전문가와 변호사.회계사를 동원하고 있는 것도 그래서이지요. "

-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것을 보면 금감위가 감독기관이 아닌 정책기관의 역할을 하는 느낌입니다. 감독기관이 정책까지 수행하는 건 잘못 아닙니까.

"지금은 긴급피난 상황입니다. 홍수가 나서 모두 떠내려가고 있는 상황이나 마찬가지예요. 구조가 급하니 당장 홍수현장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나설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지금 금감위가 하고 있는 정책적인 사항은 긴급피난적인 성격으로 이해해줘야 합니다."

- 그러다 보니 금감위에 너무 힘이 집중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는데, 내과처방을 쓸 곳에도 외과처방을 내리지나 않을는지요.

"물론 누군 죽고, 누군 살고, 하는 식의 시비가 있을 수 있지요. 그러나 금융의 시장기능을 정상적으로 회복시키지 않고서 한국경제를 살릴 수 있는 다른 방책이 있습니까. 다소간의 부작용과 혼란이 불가피하겠지만 개혁의 골간을 흐트러뜨릴 수 없습니다.

9월이면 윤곽이 잡힐테고 연말까지는 마무리지을 계획입니다."

- 대통령이 은행에 대한 장악력이 떨어진다고 야단치던데, 개혁의 강도 때문입니까, 아니면 속도 탓입니까.

"개혁의 플랜은 좋은데 진행이 제대로 안되고 있는데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이해합니다.

국제통화기금 (IMF) 체제가 시작된지 7개월이 됐으면 기업이나 은행에서 본질적인 내부혁신이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문제지요. 은행의 건전성을 높이라고 하니까, 기업 대출을 회수해 숫자맞추기나 하는 식으로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건 금융을 개혁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금융기관의 역할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 식의 임시변통은 용인하지 않을 겁니다."

- 빅딜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빅딜은 구조조정의 수많은 조합이 가져오는 결과의 하나일 뿐입니다. 다만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효과가 크기 때문에 관심이 쏠리고 있는 거라고 봐요. 설령 빅딜이 성사된다고 해도 구조조정이 끝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곤란합니다."

- 잘못하다가는 부채규모만 더 늘리는 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시설 과잉이나 잘못된 투자로 생산시설의 효율이 없을 경우 빅딜과 같은 구조조정을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때도 주도는 민간이 하고 정부는 미진한 부분을 도와주거나 방향을 제시해야 합니다. 대통령도 재계대표와 만나 이 점을 분명히 하지 않았습니까. 재삼 강조하지만 가장 중요한 정책목표는 기업들의 부채축소입니다."

- 이번 부실은행 퇴출에 대해 청산한 은행이 한곳도 없어 구제에 치우친 감이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합병을 통해 부실은행을 살리는 것과 청산을 통해 없앨 때의 비용을 따져봐야지, 무작정 청산하자고 해선 안됩니다. 또 부실은행에 대해 일방적으로 구제해준 것도 아닙니다.

주주나 경영진에 책임을 지웠고, 소액주주들까지도 출자금을 날리지 않았습니까. "

- 외국언론의 시각은 부실은행을 인수하는 바람에 멀쩡한 인수은행까지 부실해질 위험이 커졌다고 지적하던데.

"그건 내용을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인수.합병 (M&A) 은 그럴 가능성이 있지만 자산.부채인수 (P&A) 방식은 달라요. 우량의 자산과 부채만 넘겨받기 때문입니다. 우리만 하는 게 아니에요. 미국도 그런 방법을 써왔던 겁니다. " 가이드라인 제시는 불가피

- IMF나 세계은행 같은 데서는 이번 부실은행 퇴출을 어떻게 평가하던가요. "만족하고 있습니다. 외국인들의 시각을 무조건 받아들여선 곤란합니다.

이해관계가 저마다 엇갈린다는 점을 감안해야지요. "

- 대형은행의 합병을 통해 선도은행을 육성한다는 큰 밑그림이 있습니까. "오해가 없도록 이 참에 분명히 밝혀두겠습니다. 정부가 은행들에 합병해서 리딩뱅크를 만들라, 말라 하지는 않습니다.

정부가 섣불리 나서서 강권을 발동한다면 바로 그 순간에 그 합병은 실패합니다. 현재의 경영방식으론 살아남을 수 없으니 개혁적인 몸부림을 쳐야 하고, 그런 과정에서 합병의 절박한 필요를 공감해 스스로 결정해야 할 일입니다. "

- 은행더러 알아서 하라고 해놓고는 뒤로 깊숙이 개입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금융계의 현실이 어떤지는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알지 않습니까. 또 개별은행간의 이해가 얽혀 갖가지 반발이 얼마나 심합니까. 이런 마당에 정부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방향설정을 분명히하는 것은 최소한의 의무입니다.

이걸 두고 개입이냐 아니냐고 따진다면 이것도 물론 개입이지요. 그러나 모든 걸 알아서 하라고 방치하면 개혁은 부지하세월입니다. 내 양심에 비춰 이 정도까지의 개입은 불가피하다는 판단에 따라 합니다. 워낙 긴급피난적인 행위가 많기 때문에 개입과 자율을 딱 잘라놓을 수가 없습니다.

정치적 의도라든가, 개인적 이해관계가 개입된다면 더 이야기할 필요도 없어요. "

- 일반인들은 정부가 정책 차원에서 합병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또 은행장들이 이에 반발하고 있어 사표 쓰라고 했다던데.

"어떤 세상인데 무조건 힘으로 밀어붙입니까. 조건부 승인을 받은 은행에 요구한 것은 막연히 잘해보겠다는 식이 아니라 보다 현실적인 경영개선계획을 구체적으로 내라는 겁니다. 인수.합병이 아니더라도 살아날 다른 방도가 있으면 얼마든지 받아들이겠다는 뜻이지요. "

- 예금자보호에 대해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이미 지난 일입니다. 당시에는 예금인출 사태가 두려워 그랬겠지요. 그러나 지금와서 한꺼번에 원칙대로 하자고 하면 혼란만 크게 번집니다.

앞으로 금융시장이 어느 정도 안정되면 원금 규모에 따라 보호정도를 다단계로 구분해 조정해야 합니다. "

- 대통령도 제일 말 안듣고 골치 아픈 존재가 은행이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금감위 위원장도 같은 심정입니까.

"은행원은 수십년간 안정된 틀 속에서 잘 지내왔습니다. 수많은 문제가 생기는데도 그냥 끌어안고 아무일 없는 것처럼 버텨온 것입니다.

이젠 도저히 그런 틀로는 안되는 상황을 맞았으니 어찌 혼란이 없겠습니까. 이를 대체할 새로운 틀이 나와야 하는데 내부의 경영진은 이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안되느냐, 첫번째 원인은 순혈주의 탓이라고 봅니다.

자기들끼리 계속 해오다 보니 발상의 전환이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 가장 절실한 대안이 무엇입니까.

"새 피를 주입하고 외부의 자극을 끌어들여야 합니다. 하나은행이 국제금융공사 (IFC) 와, 외환은행이 코메르츠은행과 각각 합작한 것이 바로 그런 맥락들입니다.

앞으로는 싫든 좋든 외국의 기준에 따라야합니다. 이런 변화가 안 일어나면 탈락하고, 시스템을 과감하게 바꿔야 살아남는 시대가 이미 됐습니다."

- 난제들이 많은데 금감위의 현재 인력으로는 부족하지 않습니까.

"사람 숫자가 문제는 아닙니다. 정상적 감독업무야 지금까지 해온 것이고, 당면한 긴급상황을 해결해 나가는 전문가들을 충분히 활용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런 쪽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만난 사람=이장규 경제담당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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