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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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제4장 서까래를 치면 기둥이 운다

침묵이 부담스럽고 거북하다는 것은 변씨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침묵을 깨뜨리고 웃을 만한 빌미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도 몇 번인가 철규의 기색을 곁눈질하였지만, 철규도 그 때마다 입을 굳게 다물고 안개가 걷혀가는 길바닥에다 시선을 곤두박고 있을 뿐이었다.

잡담이 없는 운전석 안은 그래서 긴장감마저 돌았지만, 자동차는 기세 좋게 달리고 있었다.

변씨는 계속 줄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지금 행중의 일행들은 저마다 감당하기 어려운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봉환이가 당한 피비린내 나는 테러, 아직 중심을 못 잡고 있는 태호의 흔들림, 좀처럼 밀착되지 않는 윤종갑의 모호한 태도, 이랬다 저랬다 하고 있는 승희의 턱없는 방황 같은 것들이 그들 행중의 결집력을 비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칫하면 행중이 와해될지도 모르는 와중에 행중의 행수라는 사람이 지난 밤에 저지른 방만은 용서받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 행중이 모여 모듬살이를 결심하게 된 동기가 바로 한철규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가.

그런 처지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설혹 행수가 아니라 할지라도 신중하지 못했다는 비난은 면키 어려울 것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나이 사십을 넘긴 위인이라면, 언뜻 보아도 어딘지 모르게 듬직한 구석이 없지 않고 신중하게 처신한다는 느낌을 유지해야 했다.

그렇다면, 지난밤에도 철규는 반드시 숙소로 돌아와야만 했을 사람이었다.

계집의 하초에 박은 대갈통이 빠지지 않았다면, 자기들을 동원하는 불상사를 겪는다 하더라도 일행의 모듬살이에 작두를 갖다대는 만용을 저질러서는 안되었다.

지난밤 호텔 방에서 자지러졌던 내막을 소상하게 꿸 수는 없었지만, 십분 이해한다 할지라도 알고 보면 오입질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 오입질을 위해서 밤을 새우고 잠을 깨워야만 퉁퉁 부어오른 얼굴로 마지못해 나타난다는 것은 먹물깨나 먹었다는 위인들이 자주 듣는 핀잔인 바로 이기주의라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깟 건 먹물이 아니고 맹물을 먹은 것에 불과한 위인이었다.

괴롭거나 즐겁거나 남의 처지를 아랑곳 않고 자기 좋은 것만 소중하게 여기는 자기위주라는 말을 바로 지난밤에 보여주었던 철규에게서 발견할 수 있었다.

변씨는 때때로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가래침을 긁어 내뱉곤 하였다.

그 가래침을 철규에게 뱉어버리고 싶기도 했다.

출발한 지 한 시간이 흘러가도록 어쩐 셈인지 느글거리는 위장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문득 승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봉환이와 동거하기로 결심을 굳혔으면서도 끝내 철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그녀에게 변씨도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망할 년 그래서 어쩌자는 것이야. 변씨는 다시 한번 가래를 긁어 차창 밖으로 내뱉었다.

진부에서 영월까지는 수월한 거리가 아니었다.

그래선지 태호는 커브길에서도 속도를 확실하게 줄이는 것 같지 않았다.

한때는 앞서가던 트럭과 속도내기 경쟁까지 하는 것 같았다.

놈도 뭔가 심통이 난게지. 깜빡 잠에서 깨어난 뒤로는 취중이었는데도 다시 잠이 들지 않아 누워만 있었는데, 태호는 때때로 한숨까지 토해가며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었다.

그래서 밤을 새운 과정은 서로가 판이했지만, 뼛속이 쑤시도록 피곤한 것은 매일반이었다.

일순 철규의 시선이 자신의 뺨에 와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다가 이번엔 태호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태호가 갑자기 가속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변씨는 철규가 들어라 하고 태호를 재촉했다.

"태호 달리고 싶거든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밟아. 씨발,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밖에 더하겠어. 모두가 제 타고난 팔자 소관으로 결판이 날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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