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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1년-터지는 압력밥솥] 소비자도 기업도 '리콜 수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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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 지난해 LG전자가 일간지에 낸 압력밥솥 리콜 공고.

712대…. LG전자 고객서비스부문장 송성순 상무는 매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일선 서비스센터에서 올라온 압력밥솥 리콜 실적부터 살핀다. 잇따른 폭발로 문제를 일으킨 P-M 모델은 22일 현재 정확히 712대가 남았다. 리콜을 시작한 지 꼭 1년 만에 대상 제품 6만1889대 가운데 98.8%를 회수한 셈이다.

LG전자는 혼쭐이 났지만 압력밥솥 리콜이 남긴 교훈은 컸다. 국내 리콜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고, 리콜에 대한 소비자와 기업들의 인식도 크게 바뀌었다. 소비자보호원 안전센터 리콜제도팀 박재구 부장은 "리콜이라면 최소 규정대로만 하던 소극적 관행에서 벗어나 기업이 적극적인 리콜 의지를 보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과거엔 어물쩍 넘어가던 기업들의 허물은 이제 신문.방송.인터넷 등 다양한 대중매체와 높아진 소비자 의식 앞에 숨을 곳이 없어졌다. LG전자 밥솥의 경우 폭발 현장이 피해자들의 제보로 신문.방송에 생생하게 공개됐다. 재정경제부 신윤수 소비자정책과장은 "선진국형 '리콜 사회학'이 새롭게 자리잡는 계기가 됐다"고 분석했다.

최근 한국에서도 자발적 리콜을 실시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소비자보호법에 리콜 규정이 마련된 이듬해인 1997년 13건에 그쳤던 리콜 건수는 지난해 74건을 기록했다.

하지만 기업들의 리콜 인식은 여전히 부정적인 쪽이다. 과감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신속한 조치를 취하는 기업은 아직 드물다. 최근에는 '소음이 심하다'는 소비자들의 불만을 무시해온 국내 유명 MP3 업체가 네티즌들로부터 '난타' 당해 벼랑에 몰린 끝에야 뒤늦게 리콜에 나서기도 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최숙희 수석연구원은 "기업들도 리콜이 지니는 '위기 관리'와 '비용 관리' 측면을 주목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적극적 리콜은 더 이상의 위기 확산을 막는 유용한 장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단기적인 비용을 걱정해 리콜을 머뭇거리다 기업 이미지 하락과 막대한 비용 지출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LG전자의 경우 압력밥솥은 구색 상품에 지나지 않았다. 문제의 P-M 모델 판매액은 대략 100억원으로 추산된다. 지난해 LG전자 매출액(20조1769억원)의 0.05%에도 못 미치는 액수다. 더구나 말썽을 일으킨 내솥(오븐)은 밥솥에 들어가는 280개 부품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런 미미한 부품 하나가 LG전자를 흔든 뇌관이 돼버렸다. 기업의 리콜 정책과 브랜드 가치가 직결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LG전자의 초반 대응은 기존 관행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회사 측이 압력밥솥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안 것은 지난해 5월 말. 일선 대리점에 '자꾸 밥솥에서 김이 샌다'는 소비자 불만이 꼬리를 물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점검한 결과 내솥이 규격보다 작다는 결함이 발견됐다. LG전자는 관련 법에 규정된 최소한의 리콜만 하다 밥솥이 연이어 터지자 부랴부랴 전사적 대응에 나섰다.

LG전자 김쌍수 부회장은 지난달 "이번 일을 교훈삼아 품질 혁신과 고객 감동에 매진한다면 고객에게 더 큰 만족을 주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직원들을 독려했다. 이때부터 LG전자는 전방위 리콜에 나서 떨어진 기업 이미지를 거의 완전히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리콜에 대한 소비자 의식도 변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특히 리콜 호응률이 낮은 것은 문제다. LG전자의 남아 있는 700여대의 밥솥은 언제 폭발해 자신의 피해로 이어질지 모르는 만큼 소비자 스스로 리콜에 적극 응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최근에는 소비자들이 대리점 등에서 물건을 사고 난 뒤 품질보증서를 기업에 보내는 경우가 많아졌다. 기업도 판매 데이터 베이스를 제대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리콜하기 위해 소비자를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서다. 압력밥솥 리콜 사건이 남긴 긍정적인 변화다.

이현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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