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위험하다]8.정책 부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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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지난달 불거진 국립문화기관 운영의 민간위탁안에 대해 문화관광부는 지금까지도 청소.경비업무를 제외하고는 민간위탁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동안 언론에 비친 여론에는 귀를 틀어막고 있는 것이다.

과연 21세기 문화전쟁 시대를 맞아 '창의적 문화국가건설' 을 이끌 만큼 열린 마음을 갖추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사실 국립문화기관 운영의 민간위탁 필요성에 대한 논의는 문화부에서 먼저 제기되었다.

지난해 문화부 산하의 문화정책개발원에서 이를 연구과제로 채택했던 것이다.

연구과정에서 이들 기관에 근무하는 공무원들의 저항이 너무 거세 중단되고 말았다.

관료 개개인의 이해관계가 문화정책보다 우선되는 마당에 올바른 문화정책을 기대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 문화계는 대개혁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문화부가 지난 23일 당정회의에 내놓은 자료를 보면 지난 1/4분기 예술의 전당 등 주요공연장의 월평균 공연수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6.4% 줄었고, 공연장 평균객석 점유율도 지난해 70%에서 40%로 뚝 떨어졌다.

그렇다면 문화부의 분석처럼 그 원인을 경제난국 탓으로만 돌릴 것인가.

문화계 종사자들은 그보다는 문화정책 부재가 근본 원인이라고 질타한다.

지난 90년에 '문화발전10개년 계획' 이 발표되고 김영삼 전 (前) 정권에서도 '신한국 문화창달' 을 외쳤지만 어디까지나 '구호' 수준에서 그쳤을 뿐 구체화된 것이 없다.

90년부터 그래도 문화가 중요하다고 외치면서 계속해오고 있는 '문화예술의 해' 행사도 내실을 찾기 힘든 이벤트에 그치기는 마찬가지다.

문화계에서는 여기에 매년 투입되는 10억여원의 예산을 학교의 문화교육에 투입했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반응이 많다.

올해 '사진영상의 해' 에 무슨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보라. 현재 문화부가 내세우는 정책방향은 감독.통제보다는 지원.평가, 시설보다는 프로그램 중심으로 요약된다. 구체적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큰 관심을 쏟고 있다는 영상산업 쪽의 정책현실은 어떤지 살펴보자.

김대통령의 뜻에 화답하듯 문화부는 서울강남구논현동에 영상벤처빌딩을 추진 중인데 입주대상후보업체 중 애니메이션 분야의 명단을 보면 벤처기업과는 상당한 거리가 느껴진다.

종업원이 3백명 가까운 업체도 눈에 띌 뿐 아니라 외국 애니메이션을 하청 제작하는 회사도 여럿 들어 있다.

그래서 애니메이션 업계 내부에서는 선정작업을 애니메이션제작자협회에 일임했기 때문에 협회에 가입하지 않은 소규모 벤처기업들이 소외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영상벤처빌딩의 입주업체 후보명단에 오른 어느 업주의 하소연에서도 문화분야가 필요로 하는 문화정책의 방향과 바람직한 행정방식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벤처빌딩이라길래 임차료가 저렴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임차료가 지금의 사무실보다 6배 정도 높아서 입주를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다.

문화부 관리들한테 벤처기업의 현실을 조금 더 깊이 헤아리는 배려를 보여달라고 감히 부탁하고 싶다. "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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