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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호흡기 달고 구술로 글쓰기 1년 만에 책 한 권이 됐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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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루게릭병 환자들의 희망
15년째 루게릭병과 싸우는 이정희 씨

루게릭병·백혈병·에이즈 … 난치병 있어도 불치병은 없다
가장 치명적인 건 ‘절망’이라는 병 … 살아있는 게 곧 희망
커버스토리 - 불치병과 싸우는 사람들

월간중앙 몸 속의 운동신경세포가 점차 사라지면서 몸을 움직이거나 음식물 삼키기가 힘들어지다 사지마비와 언어장애가 오고 결국 호흡장애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근위축성측삭경화증(ALS; 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이광우 교수(서울대병원 신경과)를 비롯한 연구팀은 지난 15년여 동안 밤낮없이 루게릭병으로 더 잘 알려진 이 병을 연구하고 있다.

그동안의 연구를 통해 루게릭병의 발병 기전과 그 과정에 간여하는 주요 단서를 부분적으로 밝혔지만 아직도 루게릭병의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환자들에게 루게릭병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죠. 서울대병원을 찾아오는 루게릭병 예비환자들은 대부분 다른 병원에서 어느 정도 병명과 병의 심각성을 들은 후 혹시 오진일지 모른다는 마음으로 찾거든요.”

15년간 루게릭병으로 투병 중인 이정희(60) 씨 역시 1997년 같은 기대를 가지고 이 교수를 찾았다. 이씨의 증세는 외래를 방문할 때마다 조금씩 악화됐다. 발병 4년째가 되면서 보행이 힘들 정도로 하지의 근력이 저하됐고, 1999년 말에는 환자용 의자를 사용해야 할 정도로 진행됐다.

현재는 ‘위루술 튜브’를 통해 영양을 공급받고 인공호흡기를 통해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그동안 민간요법부터 한의원·병원에 이르기까지 루게릭병에 좋다는 곳은 다 찾아 다녔다는 이씨는 그 과정을 ‘치료순례’라는 말로 표현했다. “내가 돈은 많이 없었지만 치료순례를 통해 제2의 삶에 대한 적극적인 의욕을 불태웠다고 생각해요.”

이씨는 인터넷을 통해 병에 관한 최신 문헌을 검색해 이 교수에게 알려주기도 했고, 미국에서 임상실험 중인 약물의 치료효과 등에 대해서도 함께 토의했다. 이런 과정에서 이 교수는 루게릭병의 치료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다소나마 환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환자들과 환자 보호자들에게 질병에 관한 정보를 쉽게 알려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01년 이 교수는 이렇게 생각을 같이 하는 환자와 환자 가족을 모아 ‘한국ALS협회’를 결성했다. 당시 반지하 전세방에 살던 이씨는 고교 동창들이 모아준 3,200만 원을 다른 환자들을 위해 써 달라며 기부해 한국ALS협회 창립에 기폭제 역할을 했다. 이렇듯 적극적인 투병생활을 하던 이씨에게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든 순간이 찾아왔다.

10년 동안 자신을 간호하던 남편이 2005년 뇌출혈로 쓰러진 것. “남편이 식물인간이 돼서 2년 동안 나와 한 방에서 투병생활을 했어요. 한 집에 중환자가 두 명인 셈이지. 그때는 자식들의 헌신을 바라보는 것이 가장 힘들었어요.”2006년 10월. 남편이 사망한 지 딱 1주일 후 이씨는 중환자실로 실려 갔다.

그리고 그토록 거부하던 인공호흡기를 달았다. “내가 처음에는 인공호흡기를 거부했어요. 나는 그때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었어요. 왜 살아야 하는지, 왜 내가 이 병을 참으면서 살아야 하는지 굉장히 방황하고 있었어요. 그때 주치의인 이광우 교수님이 와서 ‘포기하지 마십시오. 소중한 분이십니다. 다른 루게릭병 환자들에게 힘이 되고 계시니 끝까지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시면서 내 손을 꼭 잡았어요.”

이씨는 그 말을 듣고 자신이 과연 살 만한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이틀을 고민했다고 한다. 3일째 되던 날 이씨의 목에 인공호흡기가 달렸고, 이씨는 지금껏 이 한 가닥 생명줄에 의지해 삶을 지속하고 있다. 남편이 사망한 2006년 이씨는 중이염을 앓으면서 작은 동네 병원인 요셉이비인후과 한명창 의사를 알게 되었다.

“2008년 6월이었어요. 이산화탄소 수치가 높아 인공호흡기 경보음은 울리고 귀는 안 들리고…. 그날 저녁 굉장히 불안해서 그 선생님께 왕진을 부탁 드렸어요. 그 밤에 병원에 들러 기구를 가지고 와서 치료해줬죠. 이산화탄소 수치는 측정이 잘못된 것이라고 나한테 확신을 주셨지요. 그러고 나서 책을 읽어 주셨어요. 그때 내가 비로소 ‘아하, 이 사회가 나와 함께 동행하고 있구나’ 하고 충격적으로 깨달았지요.”

그 다음날인 1년전부터 이씨는 구술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소외된 자, 외로운 자, 소리도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나타내고 같이 위로하며 동행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이제 6월 말이면 수정이 끝나 출판사를 알아봐야 할 텐데, 그게 나한테는 지금의 가장 큰 희망이자 소망이에요.”

몸이 나으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묻자 이씨는 “내 손으로 만년필을 쥐고 글을 쓰는 것”이라고 웃으며 대답한다.
“호의호식하는 것만 삶이 아니라 고통 또한 어쩌면 더욱 값진 삶의 역할일 것이라는 확신으로 저는 오늘도 투병합니다.”
낫고 싶다는 의지, 정상적인 활동을 하고 싶다는 의지를 가지고 이정희 씨는 오늘도 많은 사람과 동행한다.

감기인 줄 알았더니 급성골수성백혈병… “부모님 생각해서라도 이겨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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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에 누워 있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투병하는 이정희 씨.
성인 급성백혈병의 65%를 차지하는 급성골수성백혈병. 치료받지 않으면 발병 후 수개월 내에 사망하는 급성질환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원인을 밝히는 것이 불가능하다.

지난해 12월 입원한 대학생 박모(24) 씨는 발병 2개월 정도가 지나서야 급성골수성백혈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됐다.

“지난해 10월 감기에 걸렸는데, 그게 좀 오래갔어요. 그렇게 한 달이 지났는데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어요. 그 전에 3~4시간씩 매일 하던 농구를 10분, 20분밖에 못하게 됐어요. 체력이 떨어지면서 밥맛도 없어지고 구토 증세와 함께 체중이 3~4kg이나 빠져 감기치고는 좀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는 11월 중순 입원했다. 처음에는 폐렴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피검사를 받고는 백혈구 수치가 정상이 아니라며 더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의사의 진단에 따라 더 큰 병원으로 옮겨 정밀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급성골수성백혈병이었다.

“폐렴으로 3개월 정도만 입원하면 나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백혈병이라는 소리에 저보다는 부모님이 많이 걱정하셨어요.” 두 달 가량이나 백혈병인 줄 모르고 허송세월한 박씨는 이미 상태가 많이 악화돼 있었다. 그나마 조기에 발견했기에 다행이지, 한 달 정도만 더 시간이 지체됐으면 박씨의 생명은 위험해졌을지도 모른다.

입원 후 곧바로 항암치료에 들어갔다. 첫 4일간 7회 정도 항암치료제를 투여했다. 1차 항암치료에서 관해유도(백혈병 환자의 골수와 말초혈액에서 백혈병 세포가 발견되지 않을 정도로 감소시켜 골수 기능을 정상화하는 항암치료)에 실패해 골수이식 전에 위기가 온 적이 있었다.

담당 의사인 민우성(57) 교수는 “5월에 골수이식수술을 했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다”고 말했다. 골수이식을 하기 위해서는 환자와 유전자가 일치해야 하는데, 박씨는 유전자가 반만 일치하는 ‘반이식수술’만 했기 때문이다. 민 교수는 “수술 후 면역기전의 회복이 6개월이기 때문에 최소 11월까지는 경과를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박씨에게는 매 끼니가 고비였다. 골수이식수술을 받고 나서 항암치료제의 투여량이 늘어나 입맛이 확 떨어졌다. 속도 메슥거리고 가슴이 콱 막힌 듯한 기분에 구토까지 했다.

“지금도 여전히 입맛이 없지만 조금씩이라도 먹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맛보다 건강을 생각해서요.”

박씨가 치료받으면서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외로움이었다고 한다.

“오랜 기간 혼자 투병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 힘들었어요.”

그런 그가 병을 끝까지 이겨낼 수 있도록 큰 힘이 돼준 사람은 부모님이었다.

“부모님, 친구들, 그리고 제 여자친구, 저를 걱정해주시는 많은 분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어요. 부모님께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드리고 싶어요.”

고2 때 ‘동정파티’ 한 번으로 HIV 감염…10년째 투병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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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우성 교수는 “백혈병 치료는 환자 개개인의 상태에 따라 맞춤식으로 진행된다”고 설명했다.
10여 년 전,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던 A군은 학교에서 헌혈을 했다. 얼마 후 A군은 HIV 감염 사실을 통보받았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A군과 그의 부모님은 급히 병원을 찾았다.

당시 그를 진단했던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감염내과 김준명(56) 교수는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한다.“자기가 에이즈에 감염됐다는 사실이 너무 믿기지 않았는지 아무런 생각도 없이 무덤덤하게 와있더라고요. 그 부모는 완전히 초죽음이 돼서 왔는데….”

당시 A군의 친구들은 A군의 생일날 ‘동정파티’를 열어 준다며 사창가로 데려갔다. 그 때는 그로 인해 A군이 HIV에 감염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김 교수의 말에 따르면 HIV 보균자와 한 번 성관계를 가질 경우 에이즈에 걸릴 확률은 0.1~0.5% 정도. A군은 일생에 단 한 번의 성 접촉으로 그 미세한 확률에 해당돼 감염된 것이었다. 의대에 진학하겠다는 꿈을 꾸고 있던 A군은 에이즈 치료를 시작하면서 결국 의대에 진학하지 못했다.

김 교수는 지금도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진료를 받으러 왔던 A군의 순진하던 모습을 떠올리면 너무 안타깝다며 한숨을 쉬었다. A군은 곧바로 외래진료를 통해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이는 김 교수에게도 HIV와 길고 긴 싸움이 시작됨을 의미했다. 김 교수는 우선 A군에게 ‘칵테일요법’을 통해 여러 가지 치료제를 번갈아 복용하게 했다.

HIV 약은 부작용이 심해 어떤 약재가 A군에게 맞는지 찾아야 했다. 맞는 약재를 골라주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한 가지 약재만 쓰다 보면 내성이 생긴다는 것도 문제였다. 치료 도중 부작용이 발생하면 투여량을 조절하고 약을 교체하면서 극복했다. 김 교수는 바쁜 가운데서도 A군과 상담하는 데도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김 교수는 무엇보다 A군에게 “에이즈는 하나의 감염질환이며 확률에 의한 것일 뿐”이라며 환자 스스로 죄의식을 느끼지 않도록 격려했다. “지금 A군은 (의대는 아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잘 다니고 있어요.” 김 교수는 벌써 10여 년 전 이야기라며 “현재 A군은 결혼문제를 놓고 부모님과 의사와 함께 고민 중”이라고 말을 이었다.

치료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염될 확률은 많이 줄었지만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결혼문제는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A군은 투병생활을 하면서 어린 나이에 에이즈에 걸렸음에도 다른 에이즈 환자들이 느꼈을 만한 좌절감이나 절망감, 고민이 상대적으로 적었다”며 이 같은 A군의 자세와, A군이 에이즈에 걸렸음에도 아무런 변화 없이 똑같은 태도로 자식을 사랑하고 격려한 부모님이 에이즈를 이겨내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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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우 교수는 권위보다 친근감있게 환자를 대해 그들이 희망을 잃지 않도록 배려한다.

“난치병은 있어도 불치병은 없다”

불치명 혹은 난치병과 싸우는 사람들은 누구보다 죽음을 가까이에서 느끼는 사람들이다. 민우성 가톨릭의대 BMT(Bone Marrow Transplantation·골수이식)센터장은 또 이렇게 죽음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 중 하나다.

“혈액암의 일종인 백혈병은 1980년대 초까지는 대표적 불치병이었습니다. ‘백혈병=사망’이었죠. 지금도 치료하지 않으면 3개월 내에 90%, 6개월 내에 100% 사망해요. 다행히 현대의학의 발전으로 지금은 완치율이 70%까지 올라왔죠. 1983년 김춘추(65) 선생님이 국내 최초로 조혈모세포이식에 성공하며 국내 백혈병 치료에 획기적 발전을 이뤘죠.”

덕분에 백혈병은 이제 난치병일 뿐, 불치병은 아니다. 다만 지금도 30%는 발병 6개월 안에 사망하기 때문에 발병 후에도 10~15년씩 사는 간경화나 심장병과 달리 백혈병은 6개월 안에 사망자와 생존자가 나뉜다고 민 센터장은 말한다. 때문에 그는 환자들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는다.

스스로 죽음을 준비하고 대비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현대의학은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불치병 혹은 난치병과 싸우고 있다. 그 결과 백혈병처럼 완치율 0%에서 70%라는 명백한 쾌거를 이룬 경우도 있지만, 아직도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는 경우도 많다. 대표적 예가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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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처럼 “암=사망”은 아니지만 아직도 암의 경우 5년생존율이 52.2%밖에 안 된다. 암 환자 2명 중 1명은 5년 내에 사망한다는 말이다. <표 참조> ‘20세기의 페스트’라고 불리는 에이즈 역시 현대의학이 싸우고 있는 대표적 불치병 중 하나다.

김준명 대한에이즈협회장은 “에이즈 역시 이제는 하나의 감염질환이자 만성질환”이라고 말한다. 완치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불치병이라는 것은 맞지만, 만성질환에 가까울 정도로 치료기술이 발전했다는 것이다.

김 회장은 “1996년부터 국내에 세 가지 이상의 치료제를 번갈아 복용하는 ‘칵테일요법’이 도입되면서 에이즈에 감염되더라도 20년 이상 생존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며 “과거에는 HIV에 감염된 지 8~10년 만에 에이즈 증상이 나타나고, 그 후 3~4년 만에 죽었지만, 요즘은 치료를 잘하면 정상인과 다를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간 치료법의 획기적 발전을 이룬 백혈병·에이즈 등과 달리 아직 발병 원인조차 몰라 막연히 병마와 싸워야 하는 불치병 환자도 부지기수다. 루게릭병은 알려진 지 벌써 13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지만, 발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아 아직까지 근본적인 치료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루게릭병의 진행을 멈추게 하거나 증세를 호전시키는 약물도 아직 개발되지 않은 상태다. 2001년 신경과 교수들과 루게릭병 환자 가족들이 함께 ‘한국ALS협회’를 설립하면서 정보 수집과 치료 기회 확충, 복지정책이 마련되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는 것이 루게릭병 환자와 의사들의 말이다.

“불치병은 없습니다. 희망이 있는 한 분명히 루게릭병은 정복되고 말 것입니다.”

평생 루게릭병과 싸우고 있는 서울대병원 신경과 이광우 교수와 한국 ALS협회의 말이다. 그는 인류와 불치병의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가 죽음과 맞서 희망을 갖고 병을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환자가 그 의지를 놓을 때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이정희 씨 같은 환자는 모든 루게릭병 환자, 나아가 모든 불치병 환자의 희망이자 보물이라고 말했다.

오효림 기자 hyolim@joongang.co.kr
안창현 월간중앙 인턴기자 [laguna82@dreamwiz.com] / 최고 월간중앙 인턴기자 [ehowlrh8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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