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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욱 암살범은 ‘박지만 납치’ 지령받은 2중 스파이 조모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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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암살범은 북한과 남한을 넘나든 이중 스파이 출신의 조모씨라는 주장이 나왔다.

김경재 전 민주당 의원이 7월초 시판되는 자신의 신간 저서 『박정희 시대의 마지막 20일』(인물과사상 펴냄)에서 조씨의 증언 내용을 내용을 공개했다고 조선일보가 27일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김 전 의원은 “조씨의 말을 종합해 보면 암살은 차지철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이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며 “2005년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가 밝힌 조사 결과는 상당 부분 왜곡됐다”고 주장했다. 조씨는 책 발간 직후 기자회견 개최를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은 조씨의 증언을 토대로 한 김 전 의원의 저서 내용을 다시 정리한 것이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에 대한 암살 실행조는 2명이었고 이들은 중정(中情ㆍ국가정보원의 전신) 요원 3명의 도움을 받았다. 1979년 10월 7일 김형욱은 파리 중심부 ‘르 그랑 세르클’ 카지노에서 도박을 하던 중 이곳에서 중정 요원을 만났다. 중정 요원은 밖에서 한국 여성이 기다린다는 말을 전했다. 중정은 김형욱이 미국으로 망명한 뒤 프랑스로 올 때까지 계속 그를 관리하고 있었다. 중정 요원은 김형욱에게 “부장님, 저쪽 차에서 여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차(캐딜락)를 타고 따라가시면 됩니다”라는 말을 했다. 김형욱은 아무 의심 없이 중정 요원이 문을 열어준 두 번째 캐딜락 승용차에 탑승했다. 그 순간 뒷좌석에 앉아 있던 조씨가 김형욱의 목을 꺾었다.

합기도, 태권도 등 무술 합계가 20단이 넘는 조씨의 완력 앞에 김형욱은 속수무책이었다. 순간 “우두득!”하며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김형욱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조씨는 김형욱의 몸에서 혁대, 지갑 등 소지품을 꺼냈다. 신원을 감추기 위해서다.

암살조는 파리에서 서북부 방향으로 4㎞ 떨어진 양계장에 도착했다. 현장에는 이스라엘 정보부 ‘모사드’에 파견돼 훈련을 받고 있던 청와대 경호실 직원 곽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양계장의 관리인은 알제리 출신 노인이었다. 곽모씨는 전날 닭을 구입하는 척하며 노인과 안면을 텄다. 암살 당일 곽씨는 노인에게 술을 사준 뒤 취해 잠들게 했다. 앙계장을 지키던 개도 곽씨가 약을 먹여 재웠다. 암살조는 김형욱을 닭 사료용 분쇄기에 넣어 처리했다.

조씨와 곽씨는 김형욱을 암살한 뒤 곧바로 자신들이 묵던 허름한 호텔로 돌아와 짐을 챙긴 뒤 스페인 쪽으로 빠져나왔다. 조씨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뒤 도쿄에서 이스라엘 텔아비브행(行) 비행기를 탔다. 조씨는 그곳에서 다시 이스라엘 북부 하이파항(港)까지 간 뒤 동원수산 선적(船籍)의 ‘씨월드’호(號)를 탔다. 씨월드호는 곡물과 목재 수송을 하는 화물선이다. 그는 이 배로 벨기에의 항구도시 안트베르펜에 도착했다. 거기서 승용차를 타고 10월 1일 프랑스 파리로 잠입했다.

조씨는 김형욱을 암살한 뒤 그는 곧바로 스페인 국경까지 갔다. 거기서 1주일간 걸어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지브롤터 해협을 거쳐 모로코까지 갔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씨월드호를 타기 위해서였다. 조씨는 잠입 루트의 역순(逆順)으로 하이파항~텔아비브~도쿄 코스를 되돌아왔다.

조씨는 경남 진주 출신으로 서울의 한 사립대 사학과를 나왔다. 그의 아버지는 어릴 적 일본으로 밀항했으며 교토(京都)에서 조총련 고위 간부를 지내고 있었다. 조씨는 한일회담 반대로 촉발된 6ㆍ3사태 데모 때 신동아 화보에 크게 사진이 찍혔다. 조씨의 아버지는 그 사진을 우연히 일본에서 보고 자기 아내와 조씨, 딸을 일본으로 밀항시켰다. 조씨는 이후 북한으로 가 대남공작 총책 김중린을 만났다. 대남공작 총책 김중린은 자신과 ‘의형제를 맺자’고 했을 정도로 친분이 있었다. 조씨는 이후 김일성(金日成) 전 주석도 면담했다. 북한에서 각종 훈련과 임무를 부여받은 그는 다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귀환했으나 거리에서 한국인 여성을 희롱하는 일본 건달과 싸우다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 조사를 받던 중 불법체류자임이 발각돼 한국으로 추방 당한 조씨를 김포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던 중정 요원들에게 체포됐다. 그는 중정으로 끌려가 북한에서 박지만 납치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는 전향 선언 뒤에도 이중 스파이 노릇을 하다 북파공작대 요원이 됐다.

북한에서 밀봉교육을 받고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씨 납치 임무를 맡았던 조씨는 중정의 회유로 전향한 것이다. 조씨는 1971년 청와대에서 처음 만난 박 대통령으로부터 “자네가 내 아들을 살렸다”는 격려를 들었다.

1979년 박 전 대통령은 조씨를 다시 불러 술을 함께 마셨다. 이 자리에서 조씨가 “김형욱을 제가 처리하겠습니다”라고 했지만 박 대통령은 “뭐, 그럴 것 없어”라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미국에서 위험한 발언을 하는 김형욱 전 부장에 대해 “내가 믿었던 이놈이 나쁜 놈이로구나”라는 말을 했지만 구체적인 암살 지시를 내리지는 않았다.

조씨가 김 전 부장 암살의 진상을 밝히기로 한 것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절 북파 공작원에 대한 처우가 형편없이 낮아진 데 따른 불만 때문이다. 조씨가 이런 불만을 토로하고 다니자 의문의 사건이 잇따랐다.

DJ정권 중반 무렵 서울 은평구 진관내동 근처에서 조씨는 승용차에 치였는데 운전자가 중정 요원 출신이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노무현 정권 당시 국정원장은 조씨가 가짜라던 입장에서 돌변해 조씨에게 거액의 정착자금과 함께 고급 시계까지 선물했다.

2005년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원회는 김형욱 암살은 중정이 프랑스 중정 책임자 이상열 주불(駐佛)공사에게 지시했으며, 이 공사가 파리에서 어학 연수 중이던 신현진ㆍ이만수(이상 가명)씨를 ‘살해 실행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신ㆍ이씨는 동구권 출신의 제3국인 두 명을 끌어들여 소음(消音)권총으로 김 전 부장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정 소속인 이 공사와 신ㆍ이씨는 지원을 맡았을 뿐이고 동구권 출신이라는 2명은 바로 조씨와 곽씨였다.

디지털뉴스 jdn@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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