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한국기업 '불난집 세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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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미국 가정들이 흔히 하는 '세일' 은 종류가 많다.

차고 (車庫) 세일, 여러 가정이 함께 하는 이스테이트 (estate) 세일, 이사갈 집에서 하는 무빙 (moving) 세일 등등. 하지만 가장 싼값에 중고품을 살 수 있는 기회는 역시 불난 집 (fire) 세일이다.

그러나 이 세일도 불길이 잡혀야 판을 벌일 수 있다.

한국경제는 아직 불난 집 세일조차 할 형편이 아니다.

서울은 아직도 불타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 투자할 생각은 있지만 가격이 문제. " 한국의 경제위기를 보는 외국투자가들의 입장이다.

바꿔 말하면 이들 머릿속엔 한국은 아직 불타고 있어 시간이 갈수록 값은 떨어진다는 계산이 자리잡고 있다.

돈장사하는 이들에겐 장래에 대한 예측가능성이 투자결정의 핵심이다.

위험이 따를수록 수익도 크다는 얘기는 불타는 집엔 해당이 없다.

우리 관리들이 인용하기 좋아하는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 란 말도 친구란 이유만으론 한푼도 투자하지 않는 외국의 돈놀이꾼들에겐 통하지 않는다.

요즘 유행하는 '빅딜' 도 불길 잡아보자고 하는 짓이다.

따라서 불을 끈 뒤에나 가능한 불난 집 세일을 기다리는 외국투자가들에겐 관심 밖이다.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병행추진하겠다는 金대통령의 수사학을 들먹이며 현재의 빅딜에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외국인들도 있다.

또 대기업들은 대기업대로 빅딜 재촉하는 정부 때문에 시장에 나가 제값 못받는다고 아우성이다.

결국 시장경제를 지키는 주역은 기업이다.

이들이 앞장서 '모두의' 재산에 불길 번지기 전에 흥정을 서두르는 것이 시급하다.

예측 가능한 기업환경을 만드는 일은 정부의 책임이다.

소방수는 빨리 불길을 잡아 그나마 남은 물건이라도 내다 팔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경제가 빨리 구조조정에 나서야 하며 그것은 기업의 몫이다.

길정우 워싱턴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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