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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스포츠는 고도의 '환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밤새도록 월드컵 중계를 보면서 시청자들은 자신이 실제로 심한 근육운동을 한 것처럼 스트레스 해소와 피곤함을 느낀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을 계기로 쓴 '월드컵과 허영' 이라는 글에서 관람으로서의 축구가 기능하는 방식을 이처럼 설명한다.

그는 "월드컵이 마치 산타클로스처럼 다가왔다" 고 말한다.

붉은 여단의 테러 공포에 휩싸였던 당시 이탈리아의 상황을 바꿔 요즘에 대입하자면 환란과 엔저 (円低) 로 인한 세계증시 공황의 위기 등과 전혀 관계없는 경기 소식들만으로 월드컵은 당분간 괴롭고 골치 아픈 생각들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셈이다.

나아가 "스포츠를 둘러싼 논쟁은 정치논쟁을 대체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 이다.

대기업의 빅딜이니 정계개편 따위의 논의보다는 차범근 감독의 다음 전술이 효과가 있을 것인지에 대해 분석하는 것이 훨씬 흥미있고 호소력이 강한 형편이다.심지어 현대인들은 스포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스스로 운동선수라고 착각하는 단계에 까지 치닫고 있다.

그러므로 월드컵은 스포츠 경기 자체보다 "경기에 대한 일종의 이야기가 되고 다른 사람을 위한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아 타인이 건강함을 보여주거나 드라마를 연출하는 모습들을 즐기는 천박한 관음증" 이 되어 버린다.

한편 프랑스의 저명한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스포츠의 경쟁이 국가들간에 서로 힘을 비교하는 척도, 즉 정치적 관건이 되고 있다" 고 지적한다.

IMF의 구제금융을 받은 멕시코.한국.브라질 등은 국가 경제의 허약함을 국가대표의 축구경기의 승리로 심리적으로나마 위무받으려 한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것은 환상적 보상에 불과하다.

이미 고도로 발달한 현대스포츠는 일반인들에게는 직접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구경거리로 존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순히 구경하면서 스포츠와 관련된 것을 소비하는 것일 뿐이다.

스포츠는 이미 대량생산된 상품에 못지 않고 거대한 쇼비즈니스가 되어 일반인들은 희화적으로 자신의 감정과 감상을 투사하는 것 밖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채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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