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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laken-Unterseen 골프장에서 스위스 용병의 후예를 만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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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시절 심취했던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영향인지, TV에 나와 ‘후디리요 후디리리 후디리요’라는 요상한 혀 꼬임 노래를 부르던 김홍철과 친구들 탓인지 어린 시절부터 스위스에 대한 환상은 지나친 면이 있었다. 지천에 맑은 시냇물이 넘쳐 흐르고 새빨간 알핀 로제스가 이슬 먹고 피어 있을 것만 같았던 스위스….

물론 알프스의 풍광은 독보적으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스위스는 관광 수입으로만 먹고 사는 게으른 나라가 '결코' 아니다. 융프라우에 철로를 깔고 스스로 관광대국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스위스 은행을 통해 취리히를 세계적 금융도시로 만들며 세계적 부국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으로 둘러 싸여 끊임없는 가난에 시달렸다. 그래서 발달한 산업이 군인 수출, 즉 용병 비즈니스였다. 많은 남성들이 해외로 나가 남의 왕실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면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졌다. 과거 유럽에선 우는 아이도 스위스 용병이라면 울음을 그쳤을 정도로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스위스 루체른에는 '빈사의 사자상'이라는 유명한 조각상이 있었다. 이는 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 16세와 마리 앙뚜와네뜨 일가를 보호하다 전멸한 786명의 스위스 용병들을 기리기 위한 조각상이다. 자신들을 고용했던 루이 16세를 위해 프랑스 시민군에 맞서던 이들은 프랑스 시민군이 도망갈 것을 권했을 때에도 ‘우리가 살기 위해 도망간다면, 후세에 누가 우리 스위스 인들에게 용병을 맡기겠냐?’라며 기꺼이 목숨을 버렸다.

이런 우직함은 여전히 그들의 피 속에 내재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참 융통성 없는 모습으로 비칠 지경이었다. 골프장을 찾아가던 길에 사진을 몇 장 찍기 위해 차를 세웠다. 경찰 단속도 뜸할 토요일, 인터라켄의 외진 도로변 무인 주차장, 주말엔 무료가 아닌가 싶어 우린 다른 차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앞 차 운전자가 차에서 내리더니 셀프 카운터에 코인을 넣고 사라졌다. 그제서야 우리도 동전을 뒤적였다. 그러는 사이 앞 차 운전자가 물건을 들고 다시 돌아와 차를 빼서 나가는 것이다. 물건을 받아오는 불과 1분 여의 주차를 위해 정직하게 주차비를 정산하는 스위스 용병의 후예였다.

인터라켄, 지명을 직역하면 ‘호수 사이’라는 뜻이다. 알프스의 비경에 일조하는 툰 호수와 브리엔츠 호수 사이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곳에서 두 호수로 둘러싸인 18홀을 만날 수 있다. Golf Club Interlaken-Unterseen 코스에선 눈 쌓인 알프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알프스 줄기 어느 절벽에서 뛰어 내린 패러글라이딩들이 라운드 내내 우리 머리 위를 어지럽게 맴돌았다. 하지만 깎아지른 산이 코 앞인데 코스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평평했고 날씨는 따뜻하고 바람은 안정적이었다. 잔디가 아주 푸르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나무나 꽃들은 여느 골프장 못지 않게 형형색색의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코스 난이도가 매우 쉬웠다. 파4와 파5홀이 다소 긴 감이 있고 워터 해저드의 방해 공작이 간간이 펼쳐지긴 했지만 속임수 없이 우직하게 전개되는 코스였다. 누구라도 베스트 스코어 경신에 도전할 만 했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라운드를 진행 중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뒷팀으로 따라오는 한 사람하고 자꾸 시선이 마주치는 느낌이 들었다. 자꾸 우릴 쳐다보는 눈빛이 그저 호기심 만은 아닌 듯 했다. 분명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고 할 말이 있는 모양새였다. 결국 세 홀 정도 지나자 그가 다가왔다. 요는, 왜 1인 그린피로 두 명이 플레이를 하냐는 것이었다.


순간 모든 것이 감지되었다. 트렁크에 두 개의 캐디백과 여행 가방을 채우고 다녀야 했던 우린 협소한 공간 때문에 트롤리를 하나만 구입했었다. 대개는 골프장에서 트롤리를 하나 더 렌트 하지만 몸이 피곤하면 캐디백 하나에 클럽 두 세트를 장전하고 남편이 혼자 트롤리를 끌곤 했었다. 물론 캐디피는 2인 비용을 지불하고 손바닥 크기의 캐디피 택도 잘 보이는 곳에 두 개씩 붙이고 다녔다. 뒷 팀과의 거리가 멀다보니 택은 보이지 않고 하나 뿐인 캐디백 만 보고 오해가 생긴 것이었다. 웃으며 택을 보여주자 그도 미안한 웃음과 어색한 제스쳐로 사과를 했다.

유럽 대륙으로 건너오면서부터는 이런 식으로 2인 플레이를 자주 했었는데 생각해보니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그럼에도 10여 개 국을 지나오면서 지적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그다지 기분 나쁠 건 없었다. 극한에서도 신의를 지켰던 스위스 용병의 후예들, 그들의 우직한 준법 정신을 몸소 체험하는 경험이려니…. 더불어 메이드 인 스위스(Made in Swiss)의 브랜드 신뢰도는 더욱 높아졌다. 특히 스위스 은행, 언젠가는 나도 우직하고 준법정신 강한 너희들의 고객이 되고 말테다. 얼마면 되겠니?

이다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