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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통령-백 후보자 ‘닮은 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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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백용호(53) 국세청장 후보자는 이명박 대통령과 통하는 게 많다. ‘유년 시절의 가난’과 ‘자수성가’가 대표적인 공통점이다.

백 후보자가 전북 익산 남성고를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하고 택한 곳은 중앙대 특차 전형이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4년 전액 장학금에 생활비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대학교에 진학한 것이다. 그는 정경대 수석으로 졸업했다. 충남 보령이 고향인 그가 광주서중-남성고를 갔던 것도 집안 형편 때문이었다. 그는 대학 졸업 뒤 모교의 장학금으로 미국 유학길(뉴욕주립대)에 올랐고, 만 서른에 이화여대 교수가 됐다. 국회의원 선거에서의 시련도 이 대통령과 함께 겪었다. 그는 1996년 15대 총선에 신한국당 후보로 서울 서대문을에 출마했다 낙선했다. 그는 두 달간 불면증에 시달렸다. 하지만 이왕 낙선한 김에 제대로 해보자고 결심하는 계기가 됐다.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을 맡으면서 정치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서대문을의 옆 선거구는 종로였다. 당시 종로에서 출마해 당선됐던 이 대통령은 선거법 위반으로 국회의원직을 내놓았다. 동병상련으로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그는 이 대통령이 설립한 동아시아연구원 원장을 무보수로 맡았다.

백 후보자는 개혁적 성향이 강한 경제학자 출신이다. 89년 경실련 창립에 참여했다. 상임집행위원 및 국제위원장을 맡아 금융실명제 등 개혁 정책에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여의도 정치와는 분명히 다른 빛깔의 개혁 성향을 갖고 있다. 그것 역시 이 대통령이 선호하는 스타일이다. 그래서일까. 이 대통령은 줄곧 백 후보자에게 깊은 신임을 보냈고, 백 후보자는 이 대통령에게 강한 로열티를 보였다. 백 후보자는 동아시아연구원장으로 있으면서 당시 이 대통령의 서울시장 선거 공약을 주도적으로 만들어냈다.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에 취임하자 그는 서울시정개발연구원장이 됐다. 그는 청계천 개발, 대중교통 체계 개편 등 이 대통령의 서울 시정을 뒷받침했다.

대통령 선거 기간 이 대통령은 600여 명, 22개 포럼의 방대한 대학교수 자문단을 자랑했다. 백 후보자가 엮어낸 바른정책연구원(BPI)이었다. 대선 승리를 거머쥐자 이 대통령은 백 후보자를 경제 1분과 인수위원으로 불렀고, 이어 공정거래위원장으로 보냈다. 백 후보자는 공정거래위원장 시절 이 대통령과 여러 차례 독대를 했다. 때로는 1시간30분을 넘기기도 했다. 신뢰와 충성으로 엮인 13년 인연이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대선 캠프 시절부터 백 후보자를 지켜봐 온 정부 고위 인사는 “이 대통령에 대한 로열티가 대단하다”고 말했다. 그는 “백 후보자가 개성이 강해 대통령 측근들과 이따금 마찰을 빚어도 이 대통령이 개의치 않고 신뢰하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백 후보자 스스로도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이 한 단계 발전하려면 MB 정부가 성공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많은 이가 백 후보자를 ‘외유내강형’이라고 평한다. 대외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가 거의 없다. 공정거래위원장 시절 노조와 젊은 직원들과 격의 없이 어울렸다. 올 초 공정위 노조에서 실시한 ‘자랑스러운 공정인’ 평가에서 종합 3위에 오를 정도로 직원들에게 인기가 좋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조직은 무섭게 장악한다. 노조 평가에서도 ‘조직 관리력’은 1위였다.

특히 간부 직원들을 많이 다그쳤다. 출자총액제한제 폐지안이 국회에 계류돼 있을 때다. 공정위는 공시제도 강화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는 “공시제도가 어떻게 출총제 폐지에 따른 우려를 해소할 수 있는지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간부들은 얼어붙었다. 공정거래위원장 시절 그는 취임 두 달 뒤 간부 인사를 단행했다. 대변인과 계약직 국장들을 제외한 전 보직국장을 교체했다. 익명을 요구한 공정위 관계자는 “충분히 얘기를 들은 뒤 과감하게 인사를 처리했다”면서 “그 뒤 세세한 일에는 간섭하지 않고 권한을 위임했다”고 말했다.

이상렬·손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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