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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메네이 “시위 중단” 안 먹혀 … 이란 신정체제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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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대선 부정 의혹을 둘러싼 이란의 정국 혼란 사태가 개혁파 시위대와 정부 간의 극한 대결로 치닫고 있다. 대선에서 패한 개혁파 지도자 미르 호세인 무사비 전 총리를 지지하는 시위대는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최고 지도자의 시위 중단 요구에도 불구하고 20일(현지시간)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벌여 경찰·민병대와 충돌했다. 이란 국영 프레스 TV는 21일 “전날 경찰과 ‘테러분자’들의 충돌로 13명이 숨지고 100여 명이 부상했다”고 보도했다. CNN 방송은 테헤란 병원 관계자를 인용, “최소 19명이 사망했다”며 “150명이 사망했다는 미확인 보도도 있다”고 전했다. 이란 뉴스 통신 IRNA는 신정(神政) 체제의 상징인 이슬람 혁명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의 묘가 이날 자살 폭탄 공격으로 파괴됐다고 보도했다.

신정 국가 이란에서 종교와 입법·사법·행정 등 국정 전반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갖는 최고 지도자의 요구를 거스르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그래서 일부 전문가는 이번 사태가 이미 선거 부정 규탄 시위를 넘어 ‘신정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진행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란 헌법수호위원회는 전체 투표함의 10%를 무작위로 추출해 재검표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위원회는 24일까지 부정 선거 논란에 대한 최종 결론을 내릴 예정이다. 위원회의 발표는 이란 정국에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이란 사태에 신중한 반응을 보이던 미국도 개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성난 ‘그린 혁명(Green Revolution)’=시위대는 20일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가 전날 이번 선거의 공정성을 주장하며 불법 시위 중단을 요구했음에도 수도 테헤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고 AFP 통신이 전했다. 녹색(green) 손목 밴드를 찬 수천 명의 시위대는 친정부 바시즈 민병대와 경찰의 삼엄한 통제 속에서도 시내 중심가에 있는 ‘엥겔랍(혁명)’ 광장과 테헤란대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녹색은 무사비의 대선 운동 당시 상징색이었다. 시위대는 ‘독재자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아자디(자유)’ 광장으로 진출하려다 경찰· 민병대와 충돌했다. 경찰은 최루탄과 물대포를 쏘며 시위 진압에 나섰다. 오토바이를 탄 바시즈 민병대는 곤봉과 쇠파이프로 시위대를 무차별 공격했다. AP통신은 시위 참가자 50~60명이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전했다. 이란 보안 당국은 이날 시위를 선동한 혐의로 아크바르 하세미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의 딸과 4명의 친척을 체포했다고 현지 파스 통신이 21일 보도했다.

◆“최고 지도자 권위 도전 받아”=분석가들은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구축된 신정 체제에서 최고 지도자의 권위가 공개적으로 도전받는 것은 전례 없던 일”이라며 “신정 체제의 정당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해석했다. 무사비는 이날 자신의 웹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대선 결과 무효화 요구는 정당한 권리”라며 “국민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없다면 이란 앞에는 위험한 길이 놓이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의 발언에 대한 공개적 반박이었다. 무사비는 이어 테헤란 남서부 지역에서 행한 공개 연설에서 “순교자가 될 준비가 돼 있으며 내 길을 갈 것”이라고 말했다고 그의 측근이 로이터 통신에 전했다. 그는 이어 “내가 체포되면 전국적 규모의 총파업을 벌여 달라”고 지지자들에게 호소했다.

◆ 개입 검토하는 미국=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일(현지시간) 이란 정부에 “자국민에 대한 모든 폭력과 부당 행위를 중단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오바마는 성명에서 “이란 정부는 세계가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우리는 무고한 희생자에게 애도를 표한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오바마 행정부는 이란 사태와 관련해 신중한 입장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이란 정부가 시위를 계속 강경 진압할 경우 이 같은 불개입 정책을 재고하게 될 것이라고 뉴욕 타임스(NYT)가 이날 보도했다. 이란 정부에 대한 강력한 비난과 대응을 촉구하고 있는 미 의회와 유럽연합(EU) 지도자들의 입장에 오바마가 가세할 경우 이란 사태는 국제 문제로 확산될 전망이다. 앞서 미 상·하원은 19일 공화당 의원들이 제출한 이란 정부의 시위대 강경 진압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유철종 기자, 워싱턴=김정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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