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문제제기]패권주의적 문학비평 경계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문학평론가 홍정선씨는 최근 나온 '문학과사회' 여름호에 실린 평론 '공허한 언어와 의미 있는 언어' 에서 평론 인구의 팽창과 그로 인한 값싼 평론의 양산을 경계해 적지않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이에 대한 반론을 문학평론가 강형철씨가 보내왔다.

본지는 우리 비평계의 고질인 상업성.권위주의적 폐쇄성 그리고 아마추어리즘의 천박성 극복의 계기와 함께 비평의 바른 자세를 다잡기 위해 논쟁 마당을 마련한다.

다음 주 본란에는 홍정선씨의 반론이 실릴 예정이다.

우리 사회 전 분야는 싫건 좋건 '구조조정' 이라는 당위 앞에 직면해 있다.

이윤창출을 위한 무한증식의 맹목성을 '반성적' 으로 성찰하자는 이런 움직임은 문학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반성이란 그리 용이한 일만은 아니다.

반성을 위해 전제되는 '비판의 대상' 을 어떻게 선별해야 되는지, 반성의 주체가 지닌 비판의 기준은 무엇인지가 먼저 명료하게 밝혀져야 한다.

또한 반성을 빌미로 교묘하게 문단 패권주의를 부추기거나 예외적 지위를 누리는 비판자의 권위만 강화시키는 결과만 낳는다면 이는 또 다른 상업적 비판이라는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최근 홍정선씨는 '공허한 언어와 의미 있는 언어' 라는 글을 통해 동료 평론가들의 '글쓰기의 기초' 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고 나섰다.

함량미달의 불량평론이 아마추어 평론가들에 의해 양산되고 있다는 것이 홍씨의 주장이다.

그는 최근 1~2년 사이에 발표된 평론들에 대해 상식과 지식의 부재, 꼼꼼한 텍스트 읽기의 부재, 개념의 자의적 사용 등을 문제로 삼고 있다.

이러한 그의 문제 제기에 대해 나는 동의할 수 있다.

그가 제기하는 문제는 평론의 기초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호비판이야말로 얼마나 생산적인 일이겠는가.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그가 주장하는 이런 비판의 범주와 대상이 전혀 잘못 선정된 것이며 비판을 위한 그의 태도 자체가 오독과 불성실로 가득 차있다는 점이다.

김 소월 시 '왕십리 (往十里)' 에 대한 정끝별씨의 분석에 치밀한 독서와 상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한 홍씨의 비판 근거는 무학대사와 왕십리에 얽힌 설화에 대한 이해 유무로 귀착되고 있다.

소월의 '왕십리' 라는 작품이 무학대사의 설화와 관련 속에서 파악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해괴한 주장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고 있다.

모두가 아는 지명 유래의 속설을 정씨가 상식이 없어 작품 분석에 동원하고 있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지명의 유래와 작품의 구조는 하등 상관이 없음을 그는 식별할 수 없었던 것일까. '상식' 과 '지식' '꼼꼼한 텍스트 읽기' 를 내세운 이런 판단은 정지용의 '향수' 와 조조의 '단가행' 과의 관계를 해명하는 지점에 이르면 점입가경이다.

중국 당시 (唐詩) 의 서경적 특징이 우리 한시와 근대시에 끼친 영향을 그는 혹 이제야 학습하게 된 것은 아닐까. 짧은 지면의 한계로 더 이상 그의 작품에 대한 무지와 평론에 관한 독선을 탓할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다만 자신이 습득한 약간의 지식을 견강부회식으로 평론에 끼워넣으려고 노심초사하는 모습이나 자신의 독서법만이 옳다는 주장은 어설픈 현학취미나 권위주의의 폐습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실증주의적 토치카에 안주해 사회적 가치판단을 유보하며 문단의 패권이나 흘금거리는 태도는 이제 버려야 할 것이다.

강형철 숭의여전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