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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들의 조세 저항, 7년 걸린 대동법 호남 전역 확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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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호 32면

김홍도가 그린 ‘벼타작.’ 대동법은 농지를 많이 가진 양반 지주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담시키고 빈농에겐 면제해 주는 세법이었기에 조세 저항이 심했다(큰 사진). 오른쪽 작은 사진은 호서대동사목 표지와 호서대동절목 서문. “군자가 태어나 학문에 힘써 벼슬하는 것이 어찌 혼자의 이익이나 명예를 위한 것이겠는가. 장차 그 뜻을 백성들에게 베풀려는 것이다”는 말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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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즉위년(1659) 9월 송시열(宋時烈)은 효종의 묘지문을 지어 올리면서 “신의 기억에 따르면 봄에 삼가 대행대왕(효종)의 옥음을 들었는데 ‘마땅히 가을에 가서 호남 산군(山郡)의 대동법 실시에 대해서 의논해 결정해야겠다’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현종실록』 즉위년 9월 3일)”라고 말했다. 현종은 “호남에 대동법을 실시하는 일은 경의 말이 아니었다면 내 어찌 알았겠는가? 마땅히 의논해 처리하겠다”고 답했다. 대동법은 광해군 즉위년 경기도에서 시범 실시되었다가 효종 2년(1651)에 호서(湖西:충청도)에 확대 실시되었고 효종 9년(1658)에는 전라도 해읍(海邑:바다를 낀 읍)으로 다시 확대되었다. 효종 10년(1659) 호남 산군(山郡:내륙 군현)에도 실시하기로 했으나 그해 5월 효종이 급서하면서 무산된 것이었다.

송시열이 호남 산군의 대동법 시행을 찬성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은 의외였다. 효종 즉위 초 서인들은 대동법 실시를 찬성하는 김육(金堉) 중심의 한당(漢黨)과 반대하는 김집(金集)·송시열 중심의 산당(山黨)으로 분당되었는데 당시 송시열은 대동법 반대의 선봉장이었기 때문이다. 대동법은 각 지역의 특산물을 진상(進上)하거나 각 관아에서 쓰는 물품을 바치는 공납(貢納)을 쌀로 대체하자는 법이었다. 공납은 가짓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상공(常貢)과 별공(別貢)으로 나누어 시도 때도 없이 부과되었고 그 군현에서 생산되지 않는 산물이 부과되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형평에 맞지 않는 점이었다. 광대한 농지를 소유한 양반 전주(田主)나 송곳 꽂을 땅 한 평 없는 전호(佃戶:소작농)의 납부액이 비슷했다. 여기에 방납(防納)의 폐단까지 더해졌다. 방납업자들은 경아전(京衙前)의 관리들과 짜고 자신들의 물품을 사서 구입해야만 납부를 받아주게 했다. 방납업자와 관리들이 챙기는 뇌물 성격의 수수료가 인정(人情)인데, 현종 2년(1661) 4월 영부사 정유성(鄭維城)이 “인정(人情)으로 드는 비용이 원래의 공물 값보다 두 배나 드는 형편이라서 가산을 탕진하고 떠돌아다니는 자들이 매우 많습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배보다 배꼽이 컸다. 대사간 윤황(尹煌)은 “손에는 진상품을 들고 말에는 인정물(人情物)을 싣고 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인조실록』 14년 2월 10일)”라고도 말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고향을 버리고 유랑할 정도로 폐단이 컸지만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했다. 부과 단위를 가호(家戶)에서 농지 면적으로 바꾸고 쌀로 일괄적으로 받으면 되는 것이었다.

경기도 평택시 소사동에 있는 ‘대동법 시행비’. 효종 10년(1659) 대동법 실시에 찬성하던 김육이 세웠다. 사진가 권태균

잡다한 공납을 쌀 하나로 통일했기에 대동(大同)이란 표현을 쓰는데 농지가 많은 부호들은 많이 내는 반면 전호(佃戶)들은 면제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세정의에 가까운 이 법은 양반 전주(田主)들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조선의 개혁정치가들은 조광조가 그랬고 율곡 이이가 그랬던 것처럼 대부분 이 방안을 지지했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 유성룡은 작미법(作米法)이란 이름으로 이 법을 실시했으나 종전(終戰)과 동시에 집중 공격을 받아 실각하고 이 법도 폐기되었다.

그러나 이 법에 대한 백성들의 희구가 컸기 때문에 광해군 즉위년 경기도에서 시범 실시된 이후 진통을 겪으면서 계속 확대 실시되는 과정을 걷고 있었다. 효종이 재위 9년(1658) 7월 조정에 들어온 충청도 회덕 출신의 송시열에게 “호서(湖西:충청도)의 대동법에 대해서 백성들의 생각이 어떠하던가?”라고 묻자 송시열도 “편하게 여기는 자가 많으니 좋은 법입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그 효과는 컸다. 송시열이 당초의 견해를 일부나마 수정할 수 있었던 것은 이시방(李時昉) 때문이었다. 이시방은 인조반정 일등공신 이귀(李貴)의 아들이자 영의정 이시백(李時白)의 아우이기도 한데 그의 문집인 『서봉일기(西峯日記)』에는 그가 자주 송시열을 찾아가 대동법에 대해 역설하자 송시열도 “임금에게 진달하겠다”고 동의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양반 지주들의 이익에 반하는 법에는 암초가 너무 많았다. 김육은 효종 9년(1658) 9월 임종 직전 상소를 올려 “신이 만약 갑자기 죽게 되면 하루아침에 돕는 자가 없어져 일(대동법)이 중도에 폐지될 것이 두렵습니다”고 우려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김육이 죽은 후에는 이시방이 대동법에 정치인생을 걸었으나 그 역시 현종 1년(1660) 1월 사망했다. 『서봉일기』는 이시방이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내가 죽은 후에 누가 다시 대동법을 주장할 것인가?”라고 탄식했다고 적고 있다.

현종은 선왕의 결정사항이란 사실을 알고는 호남 산군으로 확대 실시 결심을 굳혔다. 그래서 재위 1년 6월 영의정 정태화가 전라감사와 다시 의논하자고 건의하자 “호남 산군에 대동법을 시행하는 것은 이미 완전히 결정난 것이니 거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못박았다. 현종은 7월 11일 호남 산군의 대동법 시행을 결정하고 그 시행 절목은 연해(沿海) 각 읍에 준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막상 추수기가 다가오자 반대론이 다시 들끓었다. 가장 큰 명분은 흉년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이조판서 홍명하(洪命夏)는 현종 1년(1660) 9월 “금년 호남의 농사는 연해 지역은 흉년이지만 산군에서는 약간 결실을 맺었습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의논이 대동법을 시행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하니 신은 의혹이 일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시행을 주장했으나 소용 없었다.

흉년이 들어 더욱 더 실시해야 한다는 반대론은 파묻혀 버렸고 비변사(備邊司)는 “백성들이 원하지 않는 것을 흉년에 강행하는 것은 불가합니다”라고 ‘백성’의 이름을 빙자해 반대했다. 그래서 대동법은 1년 연기되었으나 현종 2년이 되자 다시 반대론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김육의 아들인 공조참판 김좌명(金左明)은 사직 상소를 내면서 “호남에 안찰사로 나가 대동법을 시행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경직(京職)이 스스로 향직(鄕職)을 자청한 드문 경우지만 비변사는 “대동법 시행 절목도 여기에서 요리할 수 있으니 그가 꼭 그 지역에 가 있은 후에야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라고 반대했다. 그렇게 다시 1년이 더 연기되었다.

현종 3년(1662) 7월 김좌명은 “호남 산군에 대동법을 올가을부터 실시할 예정인데, 영상이 장차 사신으로 나가게 되었으니 마땅히 속히 의논해서 결정해야 합니다”라고 주청했다. 영상이 없다는 핑계로 다시 연기할 것을 우려한 것이다. 다수 벼슬아치는 반대했지만 소수 신료들의 끈질긴 노력 끝에 현종 4년(1663) 3월 12일 호남 산군에 대동법을 실시하게 되었다. 1결당 가을에 쌀 7말, 봄에 6말을 내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막상 쌀을 납부해야 할 10월이 되자 전라도 유생 배기(裵紀) 등이 상소해 “대호(大戶:부유한 집)는 대호대로 귀한 쌀을 탕진하고 소호(小戶)는 소호대로 연역(煙役:잡역)에 시달린다”면서 “옛 법을 따르고 가혹한 정사를 제거하면 되는데 어찌 반드시 새로운 법과 특별한 정치를 별도로 만들 것이 있겠습니까?”라면서 대동법 혁파를 주장했다.

반대 목소리가 높아지자 정태화·홍명하·허적 등 삼정승은 물론 송시열도 반대로 돌아섰다. 그래서 현종 6년(1665) 12월 27일 호남 산군의 대동법은 ‘백성들이 불편하게 여긴다’는 명분으로 다시 혁파되고 말았다. 이 날짜『현종개수실록』은 “대동법을 설행한 후 소민(小民:가난한 백성)들은 다 편리하다고 말했으나 대호(大戶:부유한 백성)들은 한꺼번에 쌀을 내는 것을 어렵게 여겨 모두 불편하다고 했다. 조정의 논의도 혁파해야 한다는 자가 많았다”고 쓴 것처럼 권력자들과 부자들의 조세저항이었다. 현종은 재위 7년(1666) 8월 말 각 도에 어사를 파견하면서 전라도에는 신명규(申命圭)를 보냈다. 신명규는 남루한 행색으로 촌락에 드나들며 대동법 민심을 수집한 후 “호우(豪右:부유하고 세력 있는 집)는 대동법 혁파가 편리하다고 말하고 잔호(殘戶:가난한 집)는 다시 실시되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현종실록』 7년 10월 22일)”라고 현장의 민심을 전했다. 『승정원일기』 현종 7년 11월 10일자에 따르면 현종은 “지금 어사의 옥계(玉啓)를 보니 (대신들의 말과는 달리) 백성들이 대개 대동법이 다시 실시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한다”면서 “어느 것이 진실이냐”고 추궁했다. 그러자 김좌명을 비롯한 대신들이 재실시를 주장했고 호남 산간의 대동법은 현종 7년 말 다시 살아났다. 이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전국을 초토로 만드는 현종 11~12년의 (1670~1671) 경신대기근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