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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는 숨겨진 세금, 결국 국민 부담으로 돌아온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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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호 14면

정부는 지난달 말 관광특구 내 음식점의 옥외영업을 허용하는 등 모두 280건의 규제를 한시적으로 완화하거나 없앤다고 발표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일정 기간 동안 규제를 완화하거나 중단한다는 내용이다. 중앙SUNDAY는 18일 최병선(56·사진) 규제개혁위원회 민간위원장(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을 만나 ‘한시적 규제유예’ 정책과 그의 규제철학을 들어봤다. 이날은 마침 그가 임기 2년의 규제개혁위원장으로 일한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었다.

규제 280건 ‘일단 중지’한 최병선 규개위 민간위원장

-국내외에 선례가 없는 파격적인 조치라고 들었다.
“그렇다. 규제를 중단 내지 완화해도 부작용이 없다고 판단되면 유예기간 이후 규제를 항구적으로 폐지하거나 완화한다. 규제를 만들거나 강화하고 일정 기간이 지난 뒤 규제를 연장할지를 원점에서 재검토해 필요성이 없으면 자동으로 폐지하는 규제일몰제 아이디어를 뒤집어 적용한 것이다. 기존 규제가 없어도 문제없이 잘 돌아간다면 불필요한 규제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비슷한 사례는 아니지만 미국 레이건 정부 초기에도 대대적인 규제경감 조치가 있었다. 당시 정권 교체를 앞두고 있던 민주당 카터 정부는 규제를 강화하는 진보적 법안을 대거 만들었다. 레이건이 집권하자마자 ‘과거 정부 막판에 만든 규제를 그대로 못 받는다’며 모라토리엄(규제 동결조치)을 선언하고 규제를 재검토했다. 성향을 달리하는 정부가 새로 들어서던 정권 교체기에 일어난 일이다. 그때는 아직 실행되지 않고 제정 중인 규제를 사산(死産)시킨 것이라는 점에서 이번 조치와는 다르다.”

-규제개혁위에서는 주로 신설·강화 규제를 다루는데, 이번에 발표한 280건의 규제는 모두 기존 규제다.
“맞다.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에서 기존 규제를 검토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자면 시간이 걸린다. 2~3년 뒤에 규제를 고쳐봐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다고 봤다. 정부가 경제 위기 대책으로 재정을 투입하는 시점에 규제를 풀어야 서로 상승작용도 생긴다.”

-경기가 좋고 나쁨에 따라 규제를 신축적으로 적용하는 건 문제 없나.
“규제개혁의 목표는 시대 변화에 맞게 정부와 시장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기업 하기 좋은 나라가 되고 경제도 산다. 선진국 경험을 보면 경제가 어려울 때 규제 개혁에 나섰다가 경제가 호전되면 이익집단이 들고 일어나 다시 역풍(backlash)이 분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걸 ‘규제의 시계추’라고 한다. 이건 아니다. 경제가 어려워도 훼손시키지 말아야 할 것은 분명 있다. 기업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를 선진화하기 위해 규제를 개혁하는 거다. ‘친(親)시장’과 ‘친기업’은 다르다. 친시장은 경쟁을 촉발시키기 때문에 오히려 기업에 부담이 될 수 있다. 친기업은 기존 기업을 중심으로 삼는 것이어서 잠재적인 시장 진입자를 막는 장벽이 된다.”

-280건의 규제 중 법률 개정이 필요한 게 59건이다. 그런데 6월 임시국회가 열리지 않고 있다.
“법 개정은 국회가 할 일이니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일단 행정부가 단독으로 할 수 있는 것부터 한다. 시행령·시행규칙만 개정해도 221건의 규제를 풀 수 있다. 현재 정부 각 부처가 작업 중이며, 7월 1일부터 시행한다.”

-법률을 고쳐야 하는 규제가 굵직한 것 아닌가.
“꼭 그렇지 않다. 법률에 근거가 있다고 큰 규제고, 규칙이나 고시에 있다고 작은 규제인 것은 아니다. 아주 뒤죽박죽이다. 오히려 다른 부처와 협의할 필요 없이 개별 부처 혼자 주무를 수 있는 고시나 지침에 크고 굵직한 규제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지나친 위임 행정이다. 앞으로 고시나 지침에 근거를 둔 미등록규제를 집중적으로 정비할 계획이다.”

최 위원장은 22년간 대학에서 규제정책을 강의했다. 공무원을 상대로 강의도 많이 한다. 대학·대학원 행정학과에서 규제를 많이 가르쳐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규제는 행정의 본령”이기 때문이란다. 인터뷰에서 그는 “정부는 돈과 말로 일한다” “규제는 숨겨진 세금” “규제는 허수아비” 등 잠언 같은 말을 많이 했다.
-무슨 뜻인가.

“규제는 권력작용이다. 국가가 가진 것은 강제력밖에 없다. 결국 정부의 힘은 재정(돈)과 규제(말)에서 나온다. 장애인 고용을 늘리기 위해 정부는 기업에 보조금을 주거나(재정) 의무고용을 강제하고 부담금을 물리는(규제) 정책을 쓴다. 돈으로 할 일을 말로 할 수 있고 반대도 마찬가지다. 재정과 규제를 적절하게 배합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문제가 많다. 재정이 부족하기 때문에 돈으로 할 일까지 규제로 한다. 문화재 보호가 중요하다지만 문화재청 예산은 5000억원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모두 규제에 의존한다. 건설공사 하다가 문화재가 나오면 신고하도록 하는 규제가 있다. 공사하다가 문화재가 나오면 과연 누가 신고하겠나. 신고하면 공기(工期)가 지연되고 회사가 망할 위험에 처할 수 있으니 그냥 공사를 강행한다. 문화재를 보호하려는 선한 목적의 규제가 오히려 문화재를 파괴할 수 있다는 얘기다.”

-돈이 없으면 규제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면도 있다. 하지만 ‘규제는 공짜’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장애인 고용을 늘리는 기업에 보조금을 주는 대신 일정 비율의 장애인을 고용하지 않은 기업에 부담금을 물리면 누가 이를 부담하는가. 단기적으로는 기업이지만 결국 제품 값이나 서비스 가격 상승으로 이어져 국민 부담으로 귀착된다. 그래서 규제는 보이지 않는 세금이다. 몇몇 나쁜 사람이나 부도덕한 기업을 때려잡기 위해 규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흔히들 생각하지만 결국엔 전부 국민 비용으로 전가된다. 그런데도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왜 규제 안 하느냐’고만 한다. 규제하면 그만큼 자신들의 부담이 늘어난다는 생각은 못한다. 우리나라는 개인이 부담하는 세금보다 규제로 인해 부담하는 비용이 더 많다.”

-아예 규제를 만들지 말아야 하나.
“중복규제가 너무 많다. 규제가 두겹세겹이다. 새 규제를 만들기에 앞서 기존 규제가 제대로 집행되고 있는지부터 따져야 한다. 규제는 허수아비다. 피규제자가 자발적으로 순응하려고 하지 않으면 있으나 마나 한 존재다. 사고가 터지면 공무원에게 왜 규정이 없느냐고만 따진다. 그러니 자기 책임을 모면하려면 공무원 입장에선 규제부터 만들어야 한다. 인센티브가 그렇게 작용한다. 규제 많은 것은 탓하지 않고 규제 없는 것만 탓하는 세태가 문제다.”

-‘작은 정부’에 대한 잘못된 관념도 지적했는데.
“단순히 공무원 수를 줄여야 규제도 줄어든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덩치는 줄었는데 짐만 많아지니까 탁상행정이 나오는 거다. 규제가 제대로 집행되려면 인력이 적절히 배치돼야 한다. 규제가 일상적으로 집행돼야 규제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생긴다. 법만 만들고 어쩌다 일제단속만 하면 ‘재수 없어 걸렸다’고 생각한다.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만 생기는 거다. ‘작은 정부’는 공무원 수를 줄이는 게 아니라 정부의 일과 책임을 줄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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