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원 칼럼]'더 적은 것이 더 많은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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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IMF를 극복' 한다고 한다.이런 표현은 두 가지 면에서 틀린 것이다.

첫째로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것은 금융위기지 IMF가 아니다.

IMF는 위기에 처한 경제를 구제해 주는 기능은 있지만 그런 위기를 제공하는 기구는 아니다.

둘째로 우리는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한다고 하더라도 금융위기 이전의 고성장시대로 돌아갈 가능성은 희박하다.

"IMF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그놈만 극복한다면 풍요로웠던 옛날이 되돌아온다" 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착각이다.

이번에 당면한 위기는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하고 구조적인 데다, 우리 경제의 체질도 과거에 비해 많이 달라졌기 때문에 앞으로 위기가 지나간 후에도 과거의 고도성장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실업률도 과거에 비해 높을 것이고 직업구조가 달라져 평생 안정된 직장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하게 될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의 미래에 대해 크게 비관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벌써 1인당 국민소득이 위기 이전에 비해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는데 위기가 지나간 다음에도 별로 좋아질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제 우리들 세대에는 신나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을 것이 아닌가 하고 비관할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그러나 좀 생각해 볼 일이다. 경제성장이 우리들의 삶의 전부인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들은 물질적 풍요가 삶의 전부인 것처럼 믿고 풍요만을 위해 숨 쉴 틈도 없이 계속 달려 온 것은 아니었던가 생각해 봐야 한다.

물론 경제성장이나 물질적 풍요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경제와 물질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반 (反) 경제주의 자세는 솔직하지 못하다.

위선이다. 사람은 먹어야 살고 물질을 통해 정신을 표현하게 마련이다.

다만 물질이 부족하다고 해서 정신적으로도 궁핍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진리도 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경제적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인간은 더욱 창조적일 수 있는 것이다.

1차대전 이후 독일 경제가 어려웠던 시기에 현대건축의 새로운 방향을 개척했던 미스 판 데어 로헤 (Ludwing Mies van der Rohe) 는 건축구조물에 들어가는 자료를 더욱 경제성있게 사용함으로써 기능적 구조물의 단순하고 순수한 미적 (美的) 가치를 높여 주었는데 그가 좋아했던 격언 '더 적은 것이 더 많은 것 (Less is more)' 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물질이 부족한 상황에서 더 큰, 더욱 보람있는 삶의 뜻을 만들어 내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은 예술에 있어서 표현수단을 절제 (節制) 있게 아껴써야 하듯이 인간의 삶을 설계하는데 있어서도 생활의 수단을 절약하는 것이 중요함을 뜻한다.

그렇게 하는 경우 그 결과는 삶의 보람이 경감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대되는 것이다.

지난 고도성장의 30년 동안 우리는 '더 적은 것이 더 큰 것' 이라는 진리를 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더 크고, 더 많고, 더 요란스러운 것만을 찾아 헤맸던 것 같다.

특히 정치한다는 사람들은 더 이상 조용한 대화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고 일반 시민들도 모두 대화는 포기하고 큰 목소리, 더 큰 목소리로 노래만 부른 것은 아닐까 (선거와 노래방이 생각난다) . 이제부터라도 적은 것을 귀중하게 생각하는 연습을 시작해야 한다.

'더 적은 것이 더 많은 것' 이 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과 상상력에 달렸다. 물질적으로 부족하면 할수록 인간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더 적게 소비하고 더 적게 장식하고 더 적게 요구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 앞에서 큰 소리로 고도성장 시대의 찬가를 귀에 따갑게 불러대는 것은 이제 그만했으면 한다.

그대신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조용한 목소리로 대화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

그리고 우리 나라도 1인당 국민소득이 얼마가 됐다고 세계를 향해 확성기로 고함지르는 일은 그만하고 우리는 과연 무엇을 믿고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이야기를 조용히, 진지하게 가까운 나라들과 대화할 줄 아는 성숙한 국가가 됐으면 한다.

김경원 (사회과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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