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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하프타임, 후반전 남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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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의 인생 2모작 재취업컨설팅 문을 두드린 김석찬씨가 19일 서울 여의도 노사공동재취업지원센터로 들어서고 있다. 최승식 기자

박인복(50)씨는 유통업체 본부장 출신이다. 이전에는 대기업 전자회사와 중견 통신회사에서 일했다. 지난해 3월 다니던 회사의 사업이 정리되면서 그는 새 일자리를 찾고 있다. 지원한 곳만 수십 곳. 그러나 지금까지 재취업 관문을 뚫지 못했다.

“1980년대만 해도 마음만 먹으면 취업할 수 있었는데….” 그는 말문을 잇지 못했다. “지금은 눈높이를 낮춰 차·부장급으로 지원해도 ‘45세 이하’ 연령 제한에 걸리더군요.” 기업 인사담당자들에게 수시로 전화를 걸어 채용공고가 나면 연락해 달라고 부탁도 해봤지만 “바쁘다”며 끊는 게 태반이었다.

그는 “나이 쉰이면 한창 일할 나이인데 경험을 썩히는 게 아쉽다”며 “아내가 판매사원으로 일해 생활비를 충당하는데 미안하기도 하고 올 들어선 돈 들어갈 곳이 많아졌다”고 씁쓸해했다. 그는 “대리점 개설 실적 1위의 경력을 살려 일해 보고 싶다”고 의욕을 보였다.

김석찬(52)씨는 삼성 계열사에서 부장으로 재직하다 이달 말 퇴직 예정이다. 사내 영업대상을 수상했고, 다양한 팀을 이끄는 등 22년간 쌓은 경력을 무기로 중소기업의 국내 영업·관리직을 찾는다. 요즘 틈 날 때마다 노사공동재취업지원센터를 찾아 구직 서류 작성법에서부터 이미지 메이킹 등 각종 강좌를 듣고 있다. 그는 “삼성 부장 출신이 어딘들 못 가겠느냐 싶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남들은 게임이 끝났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직 나의 인생은 전반전밖에 끝나지 않았다. 지금은 하프타임, 후반전이 남아 있다. 숨을 고르면서 인생 후반전을 준비하겠다”고 다짐했다.

중장년층 실업이 심각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40대 실업자는 18만6000명으로 지난해 5월보다 39.6%, 50대가 13만2000명으로 58.8% 늘었다. 4050세대 실업증가율은 1999년 이후 최고치다. 이를 반영하듯 ‘중앙일보 인생 2모작 프로젝트’에 신청자가 쇄도하고 있다. 이달 9일 안내 보도가 나간 지 일주일 만에 박인복·김석찬씨를 비롯해 30여 명이 컨설팅을 의뢰해 왔다. 삼성·LG 부장, 외국회사·중소기업 임원, 은행지점장, 연구원 등 경력도 다양하다. 전직 대기업 대표도 비공개를 전제로 의뢰했다.

중견·중소기업의 구인문의도 답지하고 있다. 자동차 몸체 부품을 만들어 GM대우 등에 납품하는 오토젠은 기획·개발·공장 운영 관련 고문직을 수행할 퇴직자를 구한다고 알려 왔다. 이노비즈협회는 본지에 의뢰한 구직자들의 이력서를 소속 기업에 뿌려 재취업을 알선하기로 했다.

“직급·급여 안 따져 … 아직 젊다, 일하게만 해 달라”

자녀가 대부분 고교·대학에 다녀 경제적 부담 커
정부 직업 훈련·알선 프로그램도 중장년층 소외

재취업의 어려움을 겪는 40, 50대는 자녀가 대부분 고교나 대학에 다녀 실직에 따른 경제적 부담이 크다. 20~30년간 일하다 갑자기 손을 놓아 불안해하기 십상이다. 구직 활동을 오랫동안 해본 적이 없어 뭘 준비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삼중고(三重苦)를 겪는 셈이다.

하지만 중장년층 구직자들은 재기를 위한 의욕을 잃지 않는다. 과거 직장에서 받던 임금 수준은 잊은 지 오래다. 이는 본지가 ‘일·만·나(일자리 만들기 나누기)’ 캠페인의 일환으로 하는 인생 2모작 재취업·창업 컨설팅을 신청한 구직자들의 사연에서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아직 젊다. 일하게만 해달라”고 입을 모은다.

상고를 나와 중소·중견기업 관리직 임원으로 근무하다 회사 자금 사정이 나빠져 지난해 7월 명예퇴직한 박용명(52)씨. 그는 “직급이나 급여를 떠나 세무·회계·경리 업무를 구한다”고 말했다. 수십 군데 원서를 내도 면접 보러 오라는 곳이 없어 가끔 일당 4만~5만원짜리 일용직도 했다. 도움이 될까 싶어 컴퓨터 교육을 받았다는 그는 “국민연금을 받을 때까지라도 뭔가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호소했다.

박광수(54)씨는 삼성전자 부장과 중견 전자회사 임원을 거쳐 올 2월 통신장비업체에서 명예퇴직했다. 해외 주재 근무를 해 영어·일어가 가능하다. 희망 업무는 영업·기획·관리 분야. 그는 “조건에 상관없이 일만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예전 회사 후배들이 창업한다고 나갈 때 많이 도와줬고 지금은 다들 대표가 됐는데 막상 자리 하나 달라니 어렵다고 합디다. 서러웠습니다.” 그는 “택시운전이나 아파트 경비를 해볼까도 했는데, 아직은 내 경력을 그렇게 쓰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눈높이도 현실에 맞춰 조정했다. 그는 “그동안 많은 기업을 적자에서 흑자로 돌려놨다. 중소기업에 가면 그 기업을 키울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러면서 “10년 전 연봉이 8000만원이었지만 지금은 3600만원, 아니 그 이하도 괜찮다”고 덧붙였다.

아직은 젊은 30대 재취업 희망자도 적지 않다. 인테리어업체 현장소장 출신인 채준병(38)씨는 올 1월 명예퇴직한 뒤 3월부터 서울 노원구 은곡직업전문학교에서 가구설계· 제작 6개월 과정을 듣고 있다. 재취업 준비를 위해 우선 경력 업그레이드용 교육을 택한 것이다. 그는 “15년 경력이 있어 임시직으로 오라는 곳이 있지만 정규직 취업을 위해 한 단계 도약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2모작 창업 컨설팅 의뢰자도 있다. 외국항공사 이사로 재직하다 지난해 5월 명예퇴직한 최희승(47)씨 경우다. 그는 판매업종 창업을 준비 중이다. 퇴직금과 실업급여로 부족해 적금·보험을 깨 1년여를 버텼지만,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그는 “외환위기 때 3개월가량 쉰 적이 있는데 대문 밖을 나가기 싫을 정도로 의욕을 잃게 되더라”며 “그래서 ‘안식년을 보낸다’는 심정으로 시간표를 짜 등산 등 취미활동을 하고 봉사활동에도 더 열심히 참여한다”고 소개했다.

40~50대는 취업자의 47%를 차지하는 핵심 계층이다. 그 때문에 높은 중장년층 실업률은 경제 전체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그럼에도 정부나 기업이 퇴직자의 인생 2모작에 대해 보이는 관심이 크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삼성경제연구소 손민중 연구원은 “미국은 55세 이상 저소득층에게 정부가 직업훈련과 알선을 해주지만 우리나라는 기본적인 일자리 알선 프로그램에서도 중장년층이 소외돼 있다”며 “고용상담 인력도 독일이 9만 명인데, 국내는 2800명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휴렛패커드에서 단순 업무를 퇴직자가 도맡아 하는 등 외국 기업은 중장년 근로자 대상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이 많은데, 국내 기업들은 몇 달간 유예 기간을 주고 구조조정을 한다”며 “정부가 퇴직관리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기업에 인센티브를 줄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글=김성탁·김기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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