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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 인터뷰]데뷔 30년 맞는 '국민가수' 조용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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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지금 조용필은 조용하다. 노래 외길 만 30년을 떠올리자면 뭔가 쓸쓸한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어쩌랴. 시대는 암울한 IMF 상황. 문득 '고독한 작은 거인' 이라는 별명이 떠오른다.

자신의 '바람의 노래' (16집.97년) 노랫말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를 되뇌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한바탕 떠들썩하게 '30년' 을 기록할 수 있었다. 아니 스스로 떠벌리지 않아도 '국민가수' 에 대한 대접은 그렇게 될 게 분명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조용필 (48) .그가 "한 몇년 뒤에 30주년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간혹 한다" 고 털어놓는 것에 먼저 아쉬움이 스친다. 오늘 그는 어떤 모습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 30년 결산과 새로운 시작을 위한 계획에 차질이 많아 보인다. 그중에서도 세계 유명 아티스트 및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와의 '글로벌 작업' 이 무산된 것이 제일 안타깝다.

"절반 이상 취소로 보면 된다. 해외작업엔 직접적인 비용 말고도 로열티가 나간다. 외화절약 차원에서 30년 스페셜 앨범은 '순 (純) 국산품' 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다음달 녹음에 들어가 9월초에 발매된다. "

- 새 앨범의 컨셉트는.

"빠른 템포.발라드.록.소프트록 등 여러 장르를 모두 소화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 음악을 재정비 또는 총결산하는 의미를 담을 작정이다. 민요 종류는 빠졌다. "

- 아름다운 추억도 좋고, 상처도 좋고, 지난 30년을 돌아본다면.

"아련하다. 1901년생의 아버지를 떠올려봐라. 음악을 위한 가출은 '무작정 상경' 그것이었다. 첫 무대는 서울 영등포에 있던 미8군 소속 헌병부대였던 것 같다. 정식 멤버도 아니었고 이 밴드 저 밴드를 오가며 엑스트라 형식으로 출연했다. "

사실 68년 그가 처음 가담했던 그룹 애트킨스는 3일만에 해체. 직후의 파이브 핑거스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당시 많은 젊은이들은 음악이 좋아서 덤볐고 한다는 것 자체를 좋아했던 것이다.

- 오늘의 그 아이들은 지금 홍대앞.신촌 등에 흩어져 있는 언더그라운드 클럽으로 달려가고 있다. 혹시 가본 적이 있나. 아니면 심정적인 교감 같은 것을 가져봤거나….

"아직 가볼 기회가 없었다. 어찌 보면 내가 활동하던 미8군 무대와 지금의 언더는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달라진 시대상황만큼이나 사정은 다르지 않을까. 당시의 불량배 취급 분위기, 음악을 하려면 모든 것을 버린다는 각오와 비장함이 불가피했다."

- 부산에 대해 각별한 느낌이 있나. 출세작 '돌아와요 부산항에' 도 그렇고.

"힘들었던 시기에 부산에서 활동을 많이 가졌고 우연히도 나를 키워준 노래 타이틀에도 부산이 담겨 있다. '조용필과 그림자' 시절 여름철 2개월을 늘상 부산에서 보냈다. 어려운 시절의 향수 때문인지 지금도 부산 하면 뭉클하다.

지금 가보면 광복동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겠지만. "

- 굳이 30주년이 아니더라도 당신 정도 위치면 음악적 완성도를 한 단계 높이거나 마이클 잭슨의 판문점 공연 같은 것을 기획해 의미를 남길 필요가 있을 듯도 한데.

"통일기원의 판문점 공연도 생각 안해본 건 아니다. 하지만 너무 어렵다. 정부와의 협조가 전제돼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지난해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나선 '자유' 공연과 역시 지난해 처음 가졌던 동숭동 소극장공연의 느낌도 새롭다."

- 최근 가요계는 기획에 의해 잘 만들어진 상품 (가수와 음악) 들로 가득하다. 괜찮은가. 혹시 이 대열에 동참할 의향은.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아니겠는가.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지나친 '10대 편향성' 이다. 여기에는 사회 분위기뿐 아니라 제작자와 매스컴의 책임도 있다. 하긴 최근 들어선 제작중인 댄스 취향의 음반은 거의 없다고 들었다. 거품이 빠진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혼자 활동하기에도 힘이 버겁다. "

- 지난해 앨범에서부터 창법이 좀 달라졌다. 초창기에는 로드 스튜어트와 조 카커같은 허스키 목소리를 부러워했는데.

"당시에는 미성 (美聲) 으로는 록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목소리에 대한 불만도 많았다. 지금은 탁성이 가능해져 자유롭다."

(조용필은 대마초로 활동중단 상태에 있던 78년께 독학으로 한국의 창을 마스터했다)

- 뼈아픈 얘기를 하나 하자. 94년 뮤지컬 '서울신화' 의 중도포기는 어떻게 된 것인가. 이미 예매표가 나간 상태에서 부랴부랴 포기선언을 했을 정도라 파문은 컸다.

"오프닝 보름 남짓 앞두고 공연을 취소해야 했다. 한마디로 국내 상황을 잘 모른 채 욕심만 앞섰던 것 같다. 뮤지컬을 만들 생각을 갖게 된 것은 뉴욕 브로드웨이를 돌아다니면서부터였다. 그때 뮤지컬의 세계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 '거미여인의 키스' 를 무려 아홉번 관람했을 정도) .이것이 바로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다.

단적으로 근대사에서 자전적 일대기를 다루는 그 뮤지컬은 별도의 극장을 새로 세워야하리만큼 스케일이 컸다. 그래도 한번 밀어붙여 보겠다고 끝까지 물고 늘어졌는데 졸작에 그칠 게 뻔했다.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문 닫고 매 맞는 게 낫겠다' 는 생각에 취소라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3억원 정도 날렸다."

- 완전히 포기한 것인가. 스토리를 맡았던 작가 유현종씨는 아직도 미련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뮤지컬은 영원히 할 수 없을 것 같다. 창작극의 경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적어도 5년은 매달려야 제대로 할 수 있다."

- 지난해 음악적으로 다소 거리가 있는 김민기와도 처음 만난 적이 있다는데. 혹시 음악적 공감대 같은 것을 찾아봤나.

"소극장 공연을 하고 있는데 김민기씨가 꽃을 보내왔다. 고마운 마음에 공연을 끝내고 함께 자리를 했다. 본격적인 음악 얘기는 없었다."

- 한 인터뷰에서 "내 음악에 힘을 잃을 때면 그만두겠다" 고 했다. 그러나 보브 딜런이 허약한 몸을 이끌고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감동적이지 않나.

"내 음악은 얼마전 작고한 프랭크 시내트라처럼 절대음감적인 스타일이라 힘이 달리면 끝장이다. 보브 딜런 유형의 흥얼거리는 컨트리 계열과는 그게 다르다. 결국 음정을 지탱해주는 파워가 떨어진다면 노래는 그만 부를 계획이다. 아직은 자신이 있다."

- 일이 없을 때는 뭐하나.

"주로 집에 있는다. 외출도 거의 하지 않는다. 밖에서 술도 별로 마시지 않는다. 아내 눈치도 봐야 하니까. (웃음) 손님은 주로 집으로 불러들여 만난다."

- 지나치게 폐쇄적인 삶 아닌가.

"그렇다고 본다면 할 수 없지만 나는 그게 좋다."

- 화려했던 과거를 생각하는 감회는.

"아픔도 있었다. 과거는 거의 생각지 않는다. 앞을 바라보고 산다. "

- 30년 전면 활동의 비결은.

"나도 잘 모르겠다. (웃음) 음악적 열정이면 다 통하는 건가."

이렇게 인터뷰는 끝났다. 세월의 무게란 게 그런 걸까. 외모는 여전히 좀 왜소한 동안 (童顔) 이었지만 말에는 연륜이 묻어났다. 예전의 초조함이나 불안감을 읽기도 어려웠다. 늘 외롭고 혼자였던 섬세하고 내성적 성격의 소유자. 그러나 94년 동갑내기 재미교포 사업가 안진현씨와 결혼 이후 자칭 편안한 '집안 귀신' 으로 변했다.

그의 이름자 앞에 나붙은 수식어는 숱하다. '가왕 (歌王)' '혼의 가수' '작은 거인' '아시아의 목소리' 에 이어 '도시의 가객' 까지. "어느 게 가장 마음에 끌리느냐" 는 물음에 그는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라고 대답했다.

행여 이 말이 자신의 세계에 몸을 감추는 데 있어 부담으로 여기는 건 아닐까. 오는 13~14일 오후7시30분 서울 올림픽공원 88잔디마당에서 펼쳐지는 기념무대에서만이라도 '킬리만자로의 표범' 같은 특유의 카리스마를 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만난사람=허의도 대중문화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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