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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아진 기술력, 투명해진 회계·지배구조…제값 받기 시작한 ‘한국기업 몸값’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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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미국이나 유럽 회사라면 주가가 단박에 100만원을 넘겼을 것이다.”

삼성전자가 순이익 10조8000억원을 냈던 2004년 삼성 임직원들이 하던 말이다.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 때문에 주가가 해외 경쟁업체에 비해 푸대접받는다는 푸념이었다. 당시 삼성전자뿐만 아니라 기관과 일반 투자자들도 비슷한 아쉬움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회사 주가는 아직 100만원을 넘어선 적이 없다. 이후 반도체 가격 하락으로 수익성도 악화돼 주가 100만원 이야기는 쑥 들어간 상황이다. 삼성 임직원들의 말마따나 2004년 당시 삼성전자가 미국이나 유럽 기업이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이 해 삼성전자 주가는 42만~60만원 사이를 오갔다. 휴대전화 시장의 경쟁업체인 노키아(핀란드)와 반도체 시장의 1위인 인텔(미국) 주식이 받은 대접을 삼성전자에 적용하면 주가 100만원 돌파는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이 해 순이익을 감안할 때 노키아 주가는 삼성전자에 비해 평균 31.7%, 인텔은 평균 77.7% 더 우대받았다. 이 잣대를 삼성전자에 들이대면 삼성전자 주가는 55만~106만원으로 뛰어오르게 된다.

하지만 올 들어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국내 증시를 오랫동안 짓눌렀던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해소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는 세계 수준의 극소수 대기업에 해당하는 얘기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한국 증시의 전반적인 위상이 높아질 것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

기본적으론 국내 대표 기업들의 실력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향상된 덕이 크다. 또 대기업의 회계와 지배구조에 대한 불신도 사그라졌다.

이와 함께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험도 더 이상 해외 투자자들의 두통거리가 되지 못한다. 북한 핵과 연이은 미사일 발사로 어수선하던 지난달 27일과 29일 정부는 KOTRA와 함께 홍콩과 싱가포르에서 해외 금융회사들을 대상으로 투자 설명회를 했다. 아시아 금융시장을 주름잡는 인물들이 200명씩 참석한 이 설명회에서 정부와 KOTRA는 북한 핵과 미사일에 대한 예상 질문을 만들어 답변을 꼼꼼히 준비했다. 그러나 두 곳 모두에서 이와 관련한 질문은 없었다. 지식경제부 정대진 투자유치과장은 “설명회에서는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위험 요소는 물론 기업의 회계와 지배구조에 대한 질문이 단 한 건도 없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설명회장 밖에서 만난 외국인 투자자들 일부는 한국 기업의 역동성이 강력한 오너십에 따른 것이란 칭찬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런 평가로 위상이 높아진 것은 국내 대표 기업인 삼성전자뿐이 아니다. 아모레퍼시픽의 경우 지난달 30일 현재 주가수익비율은 22.04배다. 일본 최대 화장품업체인 시세이도(33.9배)보다는 낮지만, 세계 최대의 화장품 업체인 로레알(15.8배)보다는 크게 높은 수준이다. 이는 로레알이 번 돈보다 아모레퍼시픽이 번 돈에 대한 가치를 39%가량 더 높게 쳐준 것을 뜻한다.

이 같은 분위기는 기업의 영업 현장에 직접 반영된다. 지난 2월 롯데백화점 소공동 본점 1층에서는 국내 화장품 산업사를 새로 쓸 만한 일이 벌어졌다. 세계 최고급 화장품업체인 샤넬이 빠진 자리에 아모레퍼시픽의 설화수 브랜드가 입점한 것이다. 동부증권 김태희 애널리스트는 “아모레퍼시픽은 샤넬과 로레알 등 수입 화장품과의 경쟁에서 전혀 밀리지 않고 있다”며 “국내 고급 화장품 시장의 43%를 차지할 정도”라고 설명했다. 설화수의 연간 매출은 5000억원으로 단일 브랜드로는 아시아 1위다.

LG전자의 위상도 예전에 비해 급상승했다. LG전자 주가는 주당순이익의 40배가 넘는다. 2005년에만 해도 주가수익비율이 10배에도 못 미쳤다. 그러나 노키아와 삼성전자에 이어 세계 3위의 휴대전화 업체로 도약한 데다 TV 부문에서도 좋은 실적을 낸 덕에 몸값이 껑충 뛰었다. 이 회사의 PER은 노키아와 인텔의 PER보다 압도적으로 높다.

NH증권 이윤상 애널리스트는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증시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성장성과 수익성에서 경쟁사를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전체 시장이 위축되면서 모토로라처럼 경쟁에서 탈락하는 업체들이 나타나고 있지만 두 회사는 시장 점유율을 확대해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 모토로라가 위축되면서 북미 휴대전화 시장의 절반을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장악했다.

이처럼 국내 대표 기업들은 금융위기 이후 글로벌 차원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경쟁사에 비해 유리한 고지에 섰다. 그 효과는 세계 경제가 회복되면서 더욱 뚜렷해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삼성증권 김성봉 연구원은 “경기가 회복되고 수요가 살아나기 시작하면 그동안 시장 점유율을 늘려 놓은 효과가 더 부각될 것”이라며 “시간이 갈수록 이들 기업이 받는 프리미엄도 강화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이희성·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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