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을 찾아서]구상 시인 새시집'인류의 맹점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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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얼마전 교통사고로 병상에 누워 있는 원로시인 구상 (具常.79) 의 신작시집 '인류의 맹점 (盲點)에서' 가 최근 문학사상사에서 나왔다. 46년 원산문학가동맹의 동인시집 '응향' 을 통해 문단에 나온 具시인은 그 시로 인해 북한 당국으로부터 반체제분자로 몰려 47년 월남해야 했다.

그 뒤 '구상' '초토의 시'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 등 10여권의 시집과 수필집을 펴내며 세속 권력의 유혹이나 문단내 파벌로부터 초연하게 살고 있다. 삼고초려 (三顧草廬) 해 높은 자리에 모시려해도 의연했던 삶으로 해서 具시인은 문단은 물론 사회에서 몇 안되는 올곧은 원로 대접을 받고 있다.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을 바라보며/걸레처럼 더럽고 추레한 내 마음을/그 물에 헹구고 빨아보지만/절고 찌들은 땟국은 빠지지 않는다.

//흐려진 내 눈으로 보아도 내 마음은/아직도 명리 (名利)에 연연할 뿐만 아니라/음란의 불씨도 어느 구석에 남아 있고/늙음과 병약과 무사 (無事) 를 핑계로 삼아/태만과 안일과 허위에 차 있다.

//더구나 나는 이렇듯 강에 나와서도/세상살이 일체에서 벗어나기는커녕/속정 (俗情) 의 밧줄에 칭칭 감겨 있으니/어찌 그리스도 폴처럼 이 강에서/사랑의 화신을 만날 수 있으며/싯달타처럼 깨우침을 얻겠는가?

//끝내 나는 승 (僧) 도 속 (俗) 도 못 되고/엉거주춤 이 꼬라지란 말인가?

//오오, 저 흐름 위에 어른거리는/천국의 계단과 지옥의 수렁!" '관수재시초 (觀水齋詩抄)' 란 부제가 붙은 이 시집 맨 앞에 오른 '근황' 일부분이다.

여의도 아파트 具시인의 서재가 관수재다.

거기서 한강물을 바라보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깨끗이 마음을 빨고 헹구며 써 모은 시들이 이 시집이다.

그리고 유한한 인간이지만 한없이 더 낮추면서 맑고 깨끗해져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구도의 자세가 이 시집을 꿋꿋이 받치고 있다.

이러한 자세는 具시인의 시를 정보다는 뜻으로 읽히게 만든다.

언어예술적 측면보다 진솔한 고백에 의한 교훈으로 읽히게 만든다.

해서 시와 삶을 일치시키려는 자세가 후배 문인들은 물론 일반의 귀감이 되고 있는 것이다.

"달마대사는/벽을 마주하기 9년 만에/도 (道) 도 깨우쳤다는데//나는 시에 매달린 지 50여 년/이건 원고지를 마주하면/노상 백지일 따름이니/하도 어이가 없어/남의 말 하듯 하자면/길 잘못 들었다.

//…//하지만 이제 어찌하랴?

/돌이킬 수도, 그만둘 수도 없고/또 결코 뉘우치지도 않는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헤엄을 잘 치거나 못 치거나/목숨을 다하는 그 순간까지/허우적대며 헤여댈 수밖에 없듯이/나도 이렇듯 시라고 쓸 수밖에는. " 도대체 어느 중진.원로한테서 이렇듯 부끄러운 고백이 나올 수 있을까. 팔순 다된 나이에 이런 치열한 삶의 자세가 드러날 수 있을까. 모두들 잘난 멋에 위장.왜곡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具시인의 시집은 깨끗이 씻어주고 있다.

자신을 먼저 낯추며 씻으면서. 그리고 그러한 삶을 진솔하게 고백하면서.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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