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석 서울대교구장 임명 의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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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한국 천주교 14개 교구를 상징적으로 대표해온 서울대교구장의 교체는 천주교회 내외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우선 정진석 (鄭鎭奭) 주교의 임명 배경은 한마디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보수적인 정통신학 노선에 합치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국내 상황과 관련해선 대 (對) 사회 발언이 중시되던 시대가 지나가면서 교회의 내적 성숙과 사목의 내실을 기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

교황청은 이러한 기준에 가장 충실할 수 있는 인물로 鄭주교를 선택했으리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鄭주교는 우선 시국문제 등을 둘러싸고 진보와 보수로 갈라져 내연해온 교회내 갈등을 씻어내는 '주교단과 사제단의 일치' 를 도모할 것 같다.

대외적으로는 모든 문화전통을 존중하면서 하나가 되려는 교황 바오로 2세의 새로운 천년을 향한 '그리스도교의 일치' 에 적극 노력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와의 관계 = 鄭주교가 전공한 신학의 주요 내용은 교회법이다. 특히 그가 천착한 분야는 교회법과 국법 (國法) 의 관계다. 鄭주교는 현실적으로 교회법과 사회법 사이의 갈등을 오랫동안 연구해 왔다.

따라서 鄭주교의 대정부 관계는 과거 김수환 (金壽煥) 추기경 시절에 비해 다소 유연해지면서 학구형이면서도 실천적인 그의 성격을 따라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천주교가 '하느님의 모습' 으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려는 천부인권사상에 입각해 전개한 민권운동은 일제치하.미군정 등에서 친정부적이었던 과거에 대한 참회의 성격도 띠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 천주교의 사회참여를 이끌어온 명동성당과 신임교구장 鄭주교가 시대를 앞서 읽는 사목활동을 저버리는 일은 없을 것 같다.

특히 그의 온유하고 관대한 성격과 적을 만들지 않는 대인관계는 교회내 갈등 해소에 빛을 발할 것으로 기대된다.

◇노동사목과 토착화 = 로마 가톨릭은 1891년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回勅) '레룸 노바룸 (새로운 사태에 관하여)' 이 반포된 후 진보적인 노동사목 (勞動司牧) 을 전개해 왔다.

한국 천주교도 가톨릭의 '노동헌장' 이라는 회칙 이후 1960년대 들어 반포된 교황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의 회칙 '어머니와 스승' '민족들의 발전' 등이 제시한 진보신학 노선의 사목활동에 많은 정열을 쏟아왔다.

정의구현사제단 등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 鄭주교의 노동관은 분명히 드러나 있는 게 없다. 다만 그의 개방적이고 소탈한 성격과 누구나 쉽게 만나주는 '높지 않는 문턱' 에 비춰 볼 때 근로자들을 멀리할 것 같지는 않다.

한국 천주교의 토착화, 이른바 한국화는 모든 문화전통을 존중하는 바티칸 노선과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한층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미사 전례 (典禮) 음악의 국악화 시도를 비롯해 사제의 강론복장의 한복화 등이 계속 실험되면서 한국 천주교라는 지역교회의 특수성을 나름으로 정립할 것이다.

鄭주교가 누구보다도 교회법에 정통하기 때문에 미사 전례의 토착화나 교회의 한국적 정체성 확립에 크게 기여하리라는 기대들이다.

이은윤 종교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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