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새없이 배꼽 잡는 '퓨전 피가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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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퓨전 오페라'임을 자처한 '피가로'는 우선 재미있다. 18일 저녁 공연에서도 5분에 한번꼴로 객석에서 웃음보가 터져나왔다. 원작인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가 오페라 부파(코믹 오페라)여서 그렇기도 하지만 음악보다 줄거리 전달에 치중한 박경일의 연출과 번안 덕분이다. 대사를 음악으로 처리한 레시타티보를 과감하게 생략하면서 극적인 재미를 더한 것이다.

사실 원작대로 한다면 음악과 함께 속사포처럼 뱉어내는 대사는 자막을 들여다봐도 무슨 얘기인지 쉽게 짐작할 수 없다. 국내에서 코믹 오페라가 자주 상연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페라무대 신(新)과 시티오페라단이 공동 제작한 '피가로'를 보면 '세비야의 이발사'의 줄거리가 아주 쉽게 다가온다. 이 작품은 가난한 학생 린도르, 술취한 군인, 가짜 음악선생으로 변장해 부잣집 상속녀 로지나와 결혼하는 데 성공하는 알마비바 백작의 얘기다. 로지나의 후견인을 자처하면서 로지나를 넘보던 돈 바르톨로도 이발사 피가로의 계략과 기지에 결국 항복하고 만다.

하지만 '피가로'의 재미가 조연으로 출연한 연극 배우들의 명확한 발음과 연기 덕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니 뒷맛이 그리 개운치 않다. '연극과 오페라의 결합'이 결국 음악의 희생을 담보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박태경(돈 바르톨로).황석정(베르타).김충호(피오렐로).임창규(장교) 등 연극배우 출신 조역의 연기와 정확한 대사전달에 비해 테너 조성환(알마비바 백작).바리톤 염경묵(피가로).소프라노 오은경(로지나) 등 주역 가수들의 연기는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였다. 성악가들이 맡은 배역의 대사는 그대로 노래로 처리하고 나머지는 대사로 처리해 한글과 이탈리아어 대사가 뒤섞이기도 했다. '세비야의 이발사'라는 연극에 로시니의 오페라에 나오는 아리아와 중창 몇 곡을 도입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성악가들의 연기가 부족하다지만 언제까지 오페라에 연극배우를 기용할 것인지.

이번 공연에서 돋보였던 것은 풍부한 저음과 성량을 자랑한 베이스 안균형(돈 바질리오 역)과 작품의 속살까지 잘 해부해낸 지휘자 김주현의 활약이었다. 31일까지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공연개막 오후 7시30분, 토.일 오후 4시 추가, 월요일 쉼. 02-3447-7778.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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