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한 소설, 내키는 대로 즐기시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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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여기에 아무개가 있다, 는 식의 손님끌기용 문장으로 시작하고 싶지는 않지만 작품이 작품이니 만큼 약간의 극적 장치를 통해 변화를 주고 싶다. 여기에 『얼음의 책』(문학과지성사)이라는 소설집이 있다. 작가는 올해 스물 일곱 살 먹은 한유주씨다.

실험적인 소설을 쓰는 한유주씨는 “음악 듣는 걸 특히 좋아한다”며 “음악적인 리듬과 반복이 느껴지는 작품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박종근 기자]


기대하시라. 이 책, 얼음의 표면처럼 미끌미끌 난공불락일 수 있다. 당신의 손목 위에서 얼음이 녹아 없어지기를 기다려야 하는 고통스러운 시간처럼 책 읽는 시간이 내내 괴로운 인내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 말랑말랑한 책들로 선뜻 손바꾸지 못하는 이유는 책이 나온 출판사도 출판사려니와 줄잡아 너 댓 권의 계간 문예지 봄·여름호가 한씨를 비중 있게 다루며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한유주는 요즘 한국 문단의 ‘작은 이슈’다. 이슈인 이유는 평이 엇갈리기 때문이다. 평론가 이광호씨는 소설 속 사건들을 인과율로 묶는 전통적인 소설 서사의 방식, 장르적 관습을 한유주의 작품들이 배반하고 있다고 평한다. 호의적이다. 반면 정영훈씨는 “문법의 새로움이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며 비슷한 작풍을 되풀이하는 ‘동어반복’을 경계하고 있다.

필자의 독서 체험도 평론가들의 분석과 크게 다르지 않다. 9개 단편 중 첫 번째 작품인 ‘허구 0’. 이 작품은 이렇다 할 사건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7월 4일부터 17일까지 소설을 쓰려고 하는 화자 ‘나’의 상태를 초 단위까지 쪼개며 중계하듯 보여준다. 글을 쓰는 물리적 시간을 그 길이 그대로 보여주려는 듯 하다. 제임스 조이스의 ‘의식의 흐름’ 기법 냄새가 나는데, 화자가 전철 안에서 숙소 방 안으로 수시로 순간이동한다는 점에서 차이난다.

‘흑백사진사’ ‘막’ 등은 그나마 줄거리가 건져지기 때문에 나은 편이다. 14일 한씨를 전화인터뷰해 그녀 ‘소설의 비밀’을 엿봤다.

-172쪽(‘육식식물’)을 보면 “나는 네가 떠나거나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소설이 주인공으로 하여금 떠날지 말지 결정해주지 않고 그냥 놔두기 때문에 오히려 두 가지 행동 모두에 실행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같다.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잠정적인 상태를 적는 것만으로도 소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꾸며내 독자들에게 재미나 감동을 주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사건이 지연되는 것 자체가 사건이 되는 그런 소설을 생각했다.”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사무엘 베케트의 부조리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가 그런 내용 아닌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꼼꼼히 계산하기 보다 써지는 대로 쓰는 편이다.”

-무의식적으로 써나가는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 같은 건가.

“자동기술처럼 나 자신을 풀어놓지는 않는다. 직관적으로 쓴다. 내 소설을 읽는 정답은 없다. 내키는 대로 즐기시면 된다.”

-평론가들을 의식하나.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 칭찬하면 기쁘고 비판하면 살짝 기분 나쁘다.”

한유주씨는 동국대·서울여대·한국예술종합학교 등에서 소설창작 등을 가르친다. 또 일주일에 네 번 홍대 앞 술집에서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오전 2시까지 서빙한다. 말하자면 한씨는 술집 아르바이트생이면서 시간강사이고 소설가다. 소설 작법과 삶의 태도에 있어서, 한씨는 문학의 위기라는 ‘도전’에 ‘응전’하는 한국 문학의 한 방식이다.

신준봉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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