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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세지만 기운 팔팔 … 일할 수 있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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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12일 낮 12시 서울 삼성동 코엑스 인도양홀. ‘2009 어르신 일자리 박람회’가 열린 이곳에 모인 어르신들의 표정이 진지하다. 책상에 앉아 몇십 년 만에 쓰는 이력서를 한 글자씩 정성스레 채워 가는가 하면 이력서에 붙일 증명사진을 찍기 위해 10분 이상 줄을 서 기다렸다 차례가 되자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옷매무새를 고친다. 실버모델을 선발하는 한 업체의 카메라 테스트 현장에는 어르신들이 10초에 1명꼴로 끊임없이 카메라 테스트를 받았다. 경제난이 계속되는 가운데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었다.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어르신 일자리 박람회’에서 일자리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채용공고를 보고 있다. 11~12일 이틀 동안 열린 박람회에는 1만5600명이 몰렸다. [뉴시스]


김영식(74·서울 신월동) 할아버지는 “젊은 사람 못지않게 팔팔하다”고 강조했다. 대기업에서 근무하다 1990년 퇴직한 김 할아버지는 아파트 경비원, 택배 기사 등으로 쉬지 않고 일해 왔다. 지하철을 이용해 택배 일을 하고 있는 김 할아버지는 “요즘에는 경기가 어려워 하루 5000원을 받기도 어렵다”며 “안정적인 치과용품 택배 업체에 취직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말했다. 41년간 버스 기사로 일한 소재풍(67·서울 대림동) 할아버지는 “기술을 썩히기 아까워 택배 기사로 재취업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하기 위해 일자리를 구하려는 경우도 많았다. 18년간 공인중개사로 일한 권모(60·부천 오정동) 할머니는 “자식들을 모두 장가 보낸 상황에서 밤늦게까지 일하는 부동산 중개업보다는 덜 벌더라도 출퇴근이 자유로운 일을 하려고 한다”며 “가족 광고나 실버 광고에 출연하는 모델 일을 맡고 싶다”고 말했다.


일자리 박람회는 구인 회사의 입장에서는 싼 인건비에 양질의 인력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다. 번역업체 ㈜프로번역의 번역사 모집에는 교수·교장 경력 소지자, 영어·독일어·일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는 지원자 200여 명이 이력서를 냈다. 인도네시아어 통·번역을 할 수 있다는 74세의 지원자도 있었다. 이 회사 김석훈 대표는 “예상 외로 고학력자가 많아 만족한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번역사 3400명 중 400명이 60세 이상이다.

이날 박람회에서 참석자들의 눈길을 끈 것은 커피전문점. 성북구와 월곡종합사회복지관이 다음 달 문을 여는 ‘공정무역 커피 전문점’은 설치비와 초기 자본금을 구청과 복지관이 대고, 60세 이상인 ‘실버 바리스타’가 자율적으로 운영한 뒤 수익을 나눠 갖는다. 현재 1호점이 성업 중이며, 어르신 9명은 월 35만원 정도를 받는다. 이번에는 2호점에서 일할 7명을 뽑는다.

하지만 준비 없이 박람회장을 찾는 구직자도 많다.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 한 구직업체 대표는 “어르신들이 너도 나도 ‘워드도 할 수 있다, 엑셀도 할 수 있다’고 말해 이를 검증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유용수 인사컨설턴트(네모파트너스)는 "젊었을 때의 경력과 현재의 컴퓨터 활용 능력이 조화를 이뤄야 노인 구직자와 구인업체 모두 만족할 수 있다"고 말했다.

 11~12일 열린 일자리 박람회에는 1만5600명이 참석해 6900명이 이력서를 냈다. 구직업체들은 서류 전형과 면접을 거쳐 경비원, 요양 보호사, 택배, 주차관리 요원 등에 7558명을 채용할 예정이다.

이현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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