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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 못 믿겠다’ 브릭스, 새로운 기축통화 담금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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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호 08면

‘만악의 근원(The Mother of All Evils)’.
요즘 글로벌 금융시장에선 미국 달러가 이렇게 불린다. 달러 가치가 하락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세계적 금융회사 도이체방크의 투자전략가인 오웬 피츠패트릭은 11일 미국 CBS 마켓워치와의 인터뷰에서 “미 달러 가치가 흔들리면서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있다”며 “달러가 시장 안전판으로 구실하는 게 아니라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흔들리는 美 달러 패권

달러 가치는 올 3월 초 이후 11% 정도 하락했다. 유로 등 6대 통화와 견줘 달러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지수’는 3월 초 90선에 머물렀다. 하지만 11일 현재 79까지 밀렸다. 기축통화인 달러의 가치가 단기간에 10% 넘게 빠진 경우는 이례적이다.

파장은 여러 곳으로 퍼져나갔다. 당장 미 재무부 10년 만기 채권의 수익률이 급등했다. 지난해 12월 연 2.2% 수준에서 맴돌던 금리가 지난 주말엔 연 4%에 육박했다. 그만큼 미 국채 값이 떨어졌다는 얘기다. 국제 유가도 뛰고 있다. 미 서부텍사스 원유 값은 배럴당 70달러를 돌파했다. 지난해 11월 이후 처음이다. 세계 경제가 회복될 것이란 기대감도 있지만, 달러 가치가 하락한 게 더 큰 이유로 꼽혔다.

파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떨어지는 미국 채권 값은 모기지(주택담보대출) 금리를 밀어올렸다. 미 모기지 금리는 지난 주말 연 5.7% 선에 달했다. 4월보다 1%포인트 정도 올랐다. 미 정부가 뭉칫돈을 쏟아부어 간신히 떨어뜨려 놓은 모기지 금리가 다시 오르고 있는 것이다.

미 자산운용사인 노던트러스트의 경제분석가 애셔 뱅걸로는 “미 국채 수익률과 국제 원유가격 상승이 미 경제의 위기 탈출을 가로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패닉 진정→달러 가치 하락→미 국채 하락 및 원유 가격 상승→기업 비용 증가→경기회복 지연’의 악순환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이런 우려가 10일 일부 시장에 반영됐다. 이날 국제 유가는 배럴당 70달러 선을 넘어섰고 뉴욕 증시는 주저앉았다. 유가가 경기 회복의 걸림돌이 되는 임계선인 70달러를 넘어서면서 투자심리가 얼어붙은 것이다.

달러 가치 하락이 ‘만악의 근원’
미 달러 가치 하락은 글로벌 자금 대이동을 의미한다. 지난해 9월 미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의 파산 이후 안전한 곳을 찾아 미 국채시장에 몰려들었던 뭉칫돈이 주식·원유·곡물 시장 등으로 이동(포트폴리오 조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투자심리가 회복됐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극단적으로 위험을 회피하려던 투자자들이 금융패닉이 진정되자 고수익을 좇아 좀 더 위험한 자산에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포트폴리오 조정만으로만 최근 달러 약세를 설명하기엔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세계 경제의 몰락: 달러 위기』를 쓴 리처드 덩컨은 최근 비즈니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달러에 대한 도전이 본격화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브릭스(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국가들의 움직임이 대표적인 예다.
미 국채의 33%인 1조7000억 달러어치(올 3월 말 기준)를 쥐고 있는 이들 나라가 최근 이를 내다 팔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10일 러시아 중앙은행의 알렉세이 을유카예프 부총재는 “보유하고 있는 미 국채를 차츰 줄여나갈 것”이라며 “대신 국제통화기금(IMF) 채권을 매입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미 재무부에 따르면 러시아는 3월 말 현재 1384억 달러어치의 미국 국채를 보유하고 있다. 중국·일본에 이은 세계 3위의 미 국채 보유국이다. 러시아의 미 국채 매각 의사가 알려지자 이날 뉴욕시장에서 10년 만기 미 국채 수익률이 장중 한때 연 4%까지 올랐다. 지난해 10월 15일 이후 최고치다.

이에 앞서 5일 중국 신화통신은 “중국 외환당국이 안전하고 합리적 수익이 보장된다면 중국은 500억 달러를 넘지 않는 범위에서 IMF 채권을 구입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또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도 10일 “IMF 재원 확충을 위해 IMF 채권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100억 달러를 내놓을 방침”이라고 했다. 중국이나 브라질도 외환보유액의 일부를 미국 국채 대신 IMF 채권으로 메우겠다는 것이다.

브릭스 국가들은 한걸음 더 움직이고 있다. 이들 국가의 정상들이 16일 러시아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다. 브릭스를 단일 조직체로 발전시키는 방안을 모색하고 새로운 금융감독 체계를 논의하는 게 주요 안건이다. 하지만 관심을 끄는 대목은 달러를 대신할 ‘수퍼 통화’ 논의다. 러시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미 달러를 대신할 새로운 기축통화를 논의하겠다”고 말했다.

수퍼 통화는 중국이 올 3월 처음 제안한 것이다. 애초 IMF의 특별인출권(SDR)의 쓰임새를 확대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하지만 지금은 가상의 화폐를 만들어 재정적자 급증으로 불안하기 짝이 없는 달러를 기축통화에서 밀어내자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브릭스 국가들이 내세우는 이유는 달러 가치 불안이다. 미국 중앙은행은 금융패닉을 진정시키기 위해 2조 달러 정도를 시장에 투입했다. 덕분에 지난해 10월~올 5월까지 8개월 사이에 생긴 재정적자만 1조 달러에 육박한다. 2009년 1년 동안엔 1조8000억 달러에 달할 전망이다. 인플레이션과 달러 가치 하락 우려가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하면 가장 큰 피해는 채권자인 브릭스 국가들에 돌아간다.

리처드 덩컨은 “브릭스의 수퍼 통화를 논의하는 자체가 달러가 이미 약해졌다는 방증”이라며 “이는 70년대 초 달러-금 태환의 중단 이후 진행된 달러 몰락의 연장”이라고 말했다. 그는 “71년 달러- 금 태환 중단 이후 달러 힘이 약화됐으나 90년대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미 경제가 부활하면서 다시 힘이 강화됐다”며 “하지만 이번 금융위기를 계기로 달러 몰락 속도가 다시 빨라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 세대 정도 과도기 거쳐야
그러나 ‘달러 흔들기’가 곧바로 ‘달러 패권’의 붕괴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란 게 일반적인 전망이다. 노리엘(경제학)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최근 “달러를 대신해 새로운 통화가 기축통화로 떠오르는 일은 내 생전에 보기 힘들 듯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1871년 본격화한 파운드 패권은 40여 년 만인 1914년 8월 붕괴했지만 곧바로 달러 시대가 온 것은 아니다. 30년이 더 흐른 뒤인 44년 브레턴우즈 협정이 체결된 후에야 미 달러가 세계 통화의 중심이 됐다. 한 세대 정도 과도기를 거친 것이다. 배리 아이켄그린(경제학) UC 버클리대 교수는 “과도기에 많은 일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복원 시도’다. 1920년 영국과 미국 중앙은행가와 금융가들이 이탈리아 제노바 등에 모여 영국의 금본위제 복귀를 추진했다. 당시‘자연의 법칙’쯤으로 여겼던 금본위제를 다시 시작해 ‘금→파운드→달러 등 기타 통화’ 순으로 이어지는 ‘통화 가치 결정 메커니즘(파운드 패권)’을 되살리려 했던 것이다.

실제로 1925년 영국은 금본위제 복귀를 선언하기도 했다. 일정 기간에 걸쳐 재정적자를 줄여 파운드-달러 환율을 제1차 세계대전 이전으로 되돌리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국이 재정적자 감축을 위해 복지예산을 삭감하자 노동자와 참전 군인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극심한 혼란이 벌어졌다. 결국 파운드-달러 환율을 목표치까지 조정하지 못한 채 29년 대공황을 맞았다. 연일 기업이 파산하고 실직자들이 불어나자 각국은 금본위제를 경쟁적으로 포기했다.

아이켄그린은 “미 달러가 파운드 지위에 도전했으나 20년대 당시에는 파운드 지위를 넘겨받을 만큼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타협책으로 파운드 복원이 추진됐다”고 설명했다.

달러·유로·위안 삼두체제 가능
미국은 산업생산 측면에서 영국에 버금갔던 1870년대 이른바 ‘달러 외교’를 펼치기 시작했다. 달러를 국제 통화로 만들기 위한 의도적인 노력이었다. 지금 중국이 러시아 원유를 사들이면서 위안화 결제를 하기로 한 것과 같은 일이 당시 미국과 남미 국가들 사이에 있었다. 이런 노력에도 20년대 미 달러는 파운드 지위를 넘겨받을 만큼 공신력을 얻지 못했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세계 최대 채권국으로 등장했지만, 당시 사람들은 국제 무역과 금융거래에서 여전히 파운드를 선호했다.

이런 역사적 경험을 들어 아이켄그린은 “앞으로도 유로나 위안화가 새로운 기축통화로 자리 잡기 전까지 미 달러 가치를 복원하려는 시도가 이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과도기에 나타날 수 있는 또 다른 현상은 블록화다. 이는 과도기 마지막 단계에 주로 나타난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했다. 실제로 1930년대 세계 경제는 영국 파운드, 프랑스 프랑, 미국 달러를 중심으로 블록화됐다. 이는 대공황이 낳은 보호무역주의 때문이었지만, 파운드 패권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나마 무역대금 결제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 전문가들은 30년대 같은 블록화가 재연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쪽이다. 대신 달러·유로·위안 등이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시대가 열릴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요즘 달러는 그야말로 탈태 후 어떤 모습이 될지 알 수 없는 번데기와 같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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