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부음 기사 2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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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호 35면

얼마 전 만삭의 후배와 점심식사를 했다. 미술 담당 기자인 그는 와병 중인 한 유명 여류화가의 부음(訃音) 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혹시 출산 휴가 중에 그 화가의 사망 소식이 갑자기 날아들더라도 후임자가 당황하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였다. 새 생명을 기다리면서 누군가의 죽음을 준비한다는 건, 그리 기꺼운 일은 아닐 게다. 하지만 와병 중이거나 고령인 유명 인사의 부음 기사를 미리 써놓는 일은 기자들에게 일상적이다. 그러다가 지난해 8월 세계적인 경제통신사 블룸버그는 애플의 최고 경영자 스티브 잡스의 미완성 부음 기사를 내보내는 큰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부음 기사(Obituary)를 미리 써놓을 대상이라는 건, 평가야 어쨌든 세상에 남긴 족적을 생전에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그런 인물의 일생을 더듬는 작업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나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유경의 죽음준비학교의 저자 유경(사회복지사)씨는 품위 있고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는 방법 중 하나로 자신의 사망기, 즉 부음 기사를 써 보도록 권한다. 자신을 3인칭으로 해 다음과 같은 8개의 문장으로 삶을 축약해 보면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1. ( )는 어제 ( )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 그의 사망 원인은 ( )이었다. 3. 그의 남은 가족은 ( )이며, 그는 ( )의 구성원이었다. 4. 그는 사망한 그때에 ( )을 하고 있었다. 5.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 )한 사람이었다고 기억할 것이다. 6. 그의 죽음을 가장 슬퍼할 사람은 ( )일 것이다. 7. 그가 세상에 남긴 업적은 ( )이다. 8. 그의 시신은 ( )처리될 것이며, 장례식은 그의 유언에 따라 ( )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이렇게 써본 어르신들은 말씀하신단다. “나 떠난 후에 아는 사람들이, 또 가족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할지, 나의 업적은 무엇인지 생각하다 보니 이제부터라도 조금 더 잘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든다”고.

지난 4월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했을 때, 언론사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 놨던 부음 기사들을 내보냈다. 하지만 업적 부분은 계속 수정해야 했다. 아름다운 마무리가 가져온 사회적 반향이 워낙 컸기 때문이다. 김 추기경의 각막 기증 소식에 장기 기증이 급증하고, 의식을 잃기 전 의료진에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존엄사’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죽음을 맞는 모습까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보여 준 셈이었다. 김 추기경의 부음기사는 지금도 업데이트 중이다.

지난달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을 때의 상황은 너무나 달랐다. 유서가 있지만, 주변 사람들은 물론 그 자신에게도 준비되지 않은 죽음이었다. 기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다급하게 쓴 부음 기사 제목엔 ‘서거’ ‘사망’ ‘자살’ 등 여러 표현이 난무했다. 장례가 치러진 지 2주가 지났건만 부음 기사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있다. 자연사(自然死)가 아닌 탓이다. 무엇보다 사망 원인에 대한 해석이 제각각이다.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의 부음 기사를 미리 써 보았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죽음을 택했을까. 6월의 분열된 정국을 보면서 답답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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