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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통신전쟁 (상) 국경의 장벽 넘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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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BT의 웬디 시카모어 매니저가 영국 런던 BT센터의 글로벌 비즈니스 현황판을 가리키며 해외시장 진출 전략을 설명하고 있다. [런던=이나리 기자]

지난달 찾은 영국 런던의 서남부 번화가 켄징턴 하이스트리트. 1㎞ 남짓한 거리 중심부에 이동통신 매장이 다섯 군데나 몰려 있었다. ‘오렌지’(프랑스)와 ‘O2’(스페인)·‘보다폰’(영국) 등 유럽에 뿌리를 둔 글로벌 유명 브랜드들이다. 유럽 통신업체들의 해외 활약은 대단하다. 중동·아프리카·남미·북미·아시아 등 5대양, 6대주 발 닿지 않는 데가 없다. 개중에서도 프랑스텔레콤(FT)·BT·텔레포니카가 글로벌 3총사다.

◆프랑스텔레콤, ‘오렌지’ 승부수

지난달 14일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거리 중심부의 FT 매장. 이 대형 점포의 간판엔 ‘오렌지(Orange)’란 단어 하나만 달랑 적혀 있다. 택시기사도 이곳을 ‘오렌지 숍’이라고 불렀다. FT가 이동통신과 초고속인터넷·IPTV 등 주요 서비스의 브랜드를 오렌지로 단일화한 때문이다. 파리 16구의 FT 본사에서 만난 슈테판 프랑스 이사는 “우리 회사의 해외 진출 역사는 오렌지 브랜드와 궤를 같이한다”고 말했다.

오렌지는 FT가 2000년에 인수한 영국의 이통 브랜드다. FT가 432억 유로(현재 환율 약 76조원)의 거금을 들여 이 회사를 인수한 건 해외 진출을 겨냥해서였다. FT는 프랑스 내 전화회사였다. 해외로 나가려면 이런 유선통신보다 시장 진입 장벽이 낮고 발전 가능성이 큰 이동통신 사업을 할 필요가 있었다. 막상 합병이 마무리되자 업계에선 “FT가 제 무덤을 팠다”는 비관론이 쏟아졌다. 오렌지가 영국 3위 이통사라지만 바가지를 쓴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이런 우려에 FT는 실적으로 답했다. 오렌지 인수 8년여 만에 세계 20여개국에서 1억8231만 가입자(지난해 말 현재)를 거느린 글로벌 기업이 된 것. 지난해 이통 매출 295억 유로의 3분의 2를 해외에서 거뒀다. 유·무선 통신을 합친 매출도 해외 비중이 47%에 이른다.

FT는 2005년에 거듭 승부수를 던졌다. 모든 브랜드를 ‘오렌지’로 통합하기로 한 것이다. 프랑스 이사는 “역사와 권위가 깃든 ‘프랑스텔레콤’이란 이름을 구석으로 처박을 수 없다는 반대가 많았다. 그러나 코카콜라처럼 세계 어디서나 친근하게 통할 수 있는 대표 브랜드가 절실했다”고 회고했다. 통신시장이 결합상품 위주로 재편되는 추세도 이런 결단을 하는 배경이 됐다. 실제 이 회사 매장에선 초고속인터넷·IPTV·인터넷전화를 묶은 결합상품만 판다.

◆BT, ‘부도 위기’서 글로벌 기업으로

BT는 브리티시텔레콤이라고 불리던 시절 덩치 큰 전화회사일 뿐이었다. 지금은 170개국 1270여 도시에서 네트워크·시스템 구축과 컨설팅을 해 주는 종합 정보통신기술(ICT) 서비스 기업이 됐다. 7년 전 300억 파운드(약 60조원)의 빚더미에 앉아 파산할 뻔한 이 회사를 살린 건 발상의 대전환이었다. 2002년 취임한 벤 버바이엔 최고경영자(현 알카텔-루슨트 CEO)는 기업·공공기관에 IT 인프라와 솔루션을 제공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가령 삼성전자가 해외지사를 낸다면 통신·보안부터 직원용 PC·휴대전화·콜센터까지 각종 IT 인프라가 필요하다. BT는 이런 수요를 한꺼번에 충족시키는 토털 서비스를 제공하고 운용까지 맡았다. 유럽연합(EU)·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같은 국제기구, 영국 국립보건서비스 등의 정부기관, 유니레버·마이크로소프트·삼성전자 같은 세계적 기업들이 주요 고객이다. 그룹 내 혁신업무를 총괄하는 BT디자인의 알 루어 램지 사장은 “공기업 시절의 잔재인 늑장 서비스와 무거운 조직을 털어내기 위해 정신교육과 새 업무 원칙 제정 같은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지난해 214억 파운드 매출의 41%를 해외에서 올렸다.

기업 체질을 바꾸자 영국 내 기존 사업들도 흑자로 돌아섰다. 영국 전 가구의 60%가 이 회사의 종합통신서비스 ‘홈 허브’에 가입해 있다.

이 회사의 매트 브로스 최고기술책임자(CTO)는 “BT가 단시일에 170개국에 진출한 비결은 세 가지”라고 설명했다. 첫째, BT의 브랜드 파워를 최대한 활용해 각국의 주요 통신·정보기술 업체와 손잡았다. 둘째, 영국에 근거지를 둔 다국적 기업의 해외 진출 때 적극 동참했다. 셋째, 회사 내부의 숨어 있는 역량을 적극 사업화했다. 그는 “BT가 워낙 큰 조직이다 보니 보안부터 기술 개발에 이르기까지 IT 인프라에 관한 한 걸치지 않은 분야가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인터뷰] 브로스 BT 최고기술 책임자

◆텔레포니카, M&A로 세계 공략

스페인 마드리드 외곽의 라스 타블라스 지역. 첨단 오피스타운인 이곳은 가위 ‘텔레포니카 타운’으로 부를 만하다. 이 회사 직원들이 일하는 대형 빌딩만 예닐곱 군데에 이른다.

지난달 13일 그중 한 건물에서 카를로스 데 토레스 지메노 마케팅디렉터를 만났다. 그는 “1분기 영업실적에 관한 언론 브리핑을 지금 막 마쳤다. 실적이 괜찮아 흐뭇하다”고 말했다. 텔레포니카의 글로벌 고객은 3월 말 현재 2억6140만 명으로, 1년 전보다 12% 늘었다. 이 회사의 글로벌 전략 역시 공격적 인수합병(M&A). 2004년 이후 미국 벨사우스의 남미지사, 체코의 체스키텔레콤, 영국의 O2 등을 잇따라 인수했다. 2007년엔 텔레콤이탈리아의 18% 지분을 사들여 대주주가 됐다. 중국 2위 이통사인 차이나유니콤의 10% 지분을 인수한 데 이어 추가 매입을 준비 중이다.

10년간 M&A에 쓴 돈은 800억 달러(100조원). 덕분에 남미는 본국보다 더 큰 시장이 됐다. 브라질·아르헨티나 등 9개국에서 1, 2위 통신 사업자가 된 것. 지메노 디렉터는 “스페인어를 쓰고 문화가 비슷한 데다, (스페인) 국내에 사는 외지인 중 11%가 남미 출신인 것이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이원호(일본·베트남·우즈베키스탄), 이나리(영국·프랑스·스페인)
김창우(미국), 김원배(요르단) 기자



글로벌 통신시장 이렇게 개척하라 … 키워드 네 가지

1 적극적 M&A 가 지름길

프랑스텔레콤 은 해외 진출국을 선정할 때 현지 법인 지분을 100% 가질 수 있는지 따진다. 현지 정부·기업과의 합작은 자칫 주도권 싸움으로 번질 수 있어서다. 텔레포니카의 지메노 디렉터는 “나라마다 3위권 안의 업체를 공략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영국 BT는 종합 ICT 기업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각국 정보기술기업을 공격적으로 인수하고 있다.

2 요체는 결합상품

FT는 2007년 네덜란드 시장에서 철수했다. 현지 통신업체와의 유선망 임대 협상이 지지부진해 결합상품 출시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지메노 디렉터는 “개발도상국이라도 이동통신·초고속인터넷·IPTV는 물론 모바일TV 같은 첨단 서비스를 한데 묶은 고객 친화적 상품을 내놓지 않으면 토종업체들의 텃세를 이기기 힘들다”고 말했다.

3 첨단 기술·서비스로 무장

FT가 전 브랜드를 ‘오렌지’로 통일한 데에는 나름의 노림수가 있다. 오렌지텔레콤이 1994년 설립 이후 쌓아온 고품질·첨단 서비스 이미지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실제 오렌지엔 초당 요금제 등 ‘세계 최초’ 기록이 여럿 있다. FT는 그런 이미지에 맞게 새로운 서비스 출시에 적극적이다. 덕분에 세계 2위의 IPTV 사업자가 됐다.

4 현지 문화 알아야 성공

FT는 영국에서 출시한 결합상품 요금제 이름을 동물에서 따왔다. 영국인들이 동물 이미지에 유난히 친근함을 느끼는 점에 착안했다. 프랑스의 유선통신 결합상품 이름은 ‘오리가미(일본식 종이 접기 놀이)’ 다. 오리가미에 대한 프랑스인의 호감을 고려한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 의 디미트리 입실란티 통신국장은 “FT가 아프리카, 텔레포니카가 남미에 천착하는 건 19세기 식민통치 시절부터의 오랜 인연 때문이다. 문화·언어적 배경이 유사해 상대적으로 적응하기 쉽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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