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미국 클로디어 스프링어 '사이버 에로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사람은 늘 기계에 성적 심상을 투사해왔다. 기계가 사람 육체의 연장 (延長) 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것은 당연한 것일 수 있다.

산업혁명 이후 기계가 부쩍 커지고 힘도 세지면서, 그런 투사는 더욱 뚜렸해졌다. 자동차가 성적 상징으로 여겨지는 것은 대표적이다.

최근에 컴퓨터가 빠르게 보급되고 사이버스페이스가 갑작스럽게 나타나자, 사람의 의식을 기계적 존재들이나 인공적 환경에 이식하는 일이 진지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런 일은 물론 엄청난 뜻과 영향을 지닌 일이고, 자연히 기계틀에 성적 심상을 투사하는 일에도 질적 변화가 나타났다.

'탈산업 시대의 육체와 욕망' 이라는 부제가 가리키듯 '사이버 에로스' 는 그런 질적 변화를 다루고 있다 (한나래刊) . 사람의 의식을 이식하는 일에 대한 논의는 이미 오래 전에 과학소설에서 시작됐고, 그런 작품들이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대중에게도 익숙하게 다가오게 됐다.

지난 66년에 나온 필립 디크의 단편소설 '우리는 기억을 도매합니다' 에 바탕을 두고 90년에 만들어진 영화 '토탈 리콜' 은 잘 알려진 예다. 저자 클로디어 스프링어는 미국 로드아릴랜드대학 영문학.영화학 교수인데, 주로 과학소설과 과학영화를 자료로 삼아 이같은 변화를 관찰했다.

특히 '로보캅' 등 사람과 기계의 잡종인 사이보그에 큰 관심을 보인다. 분석대상이 된 작품들에서 그의 눈길을 끈 것은 이식된 의식들이 육체를 떠난 뒤에도 성적 편향을 그대로 지닌 것으로 그려진다는 사실. 저자는 새 환경에서도 여성에 대한 성적 차별이 여전히 심하다는 사정을 개탄한다.

단단한 근육과 첨단 무기를 지닌 사이버네틱 인물들은 남성의 공격성을 신비화하며 여성성의 자연스런 발현을 가로막는 등 시대 착오적 경향을 표상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은 흥미롭고 중요한 주제를 여럿 다루었다.

과학소설과 영화들을 중요한 현상으로 보고 진지하게 다룬 터라, 이 분야에 대한 무지와 편견이 큰 우리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과학의 전통적 권위를 부정하는 사람들과 과학에 대한 믿음을 지닌 사람들 사이의 '과학전쟁' 에서 저자는 과학에 적대적인 진영에 속한다.

저자가 인문학을 전공한 여류학자라는 사정이 아마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녀의 이런 입장은 어쩔 수 없이 책 내용의 범위를 좁히고 시각을 한쪽으로 쏠리게 만들었다.

성은 중요하고 흥미로운 주제지만, 저자는 여성운동의 시각에서 성 차별에 초점을 맞추었고, 성의 기원이나 기능 그리고 진화 같은 중요한 측면들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아울러 의식의 체외 이식으로 육체가 노후화하는 상황은 다루지만, 그것이 실제로 가능한 일인가에 대한 고찰은 없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나온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생물적 사건일 터이므로, 생물학자들의 견해를 들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쉽게도 그들에게 마련된 자리는 없다.

복거일 소설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