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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제3장 함부로 쏜 화살

곰삭고 군동내가 나서 쓰레기통에 갖다버릴 신김치라도 남이 흉을 볼라치면, 비윗장이 뒤틀리듯 사정이 딱하게 되었다 할지라도 변씨가 양과부를 추물로 깎아내리는 것이 봉환에겐 마뜩치가 않았다.

그러나 변씨로서는 봉환의 태도가 칼로 자르듯 단호하지 못한 것에 쓸개가 뒤집히고 말았다.

봉환의 엉거주춤한 태도에 화증이 솟았던 변씨는 그만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그러나 봉환은 얼른 변씨의 괴춤을 잡고 늘어졌다.

"형님요. 어디로 갈라캐요?" "왜? 영동식당으로 갈란다.

자네도 나랑 같이 가서 가게를 쑥밭으로 만들어볼래? 양과부한테 가서 자네가 여기 있다고 바른대로 고자질을 해줄까?" "형님요. 실성을 했다캐도 그런 말은 하지마소. " "그럼. 가는 사람 허리춤은 왜 잡고 늘어져? 이것 놔. 알고보면, 나도 바쁜 사람이야. " 매정하게 뿌리친 변씨는 휘적휘적 영동식당 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변씨가 골목 어귀를 들어서면서 힐끗 시선을 돌렸더니, 봉환은 건빵바지에 두 손을 깊숙이 찔러넣은 채 식당과는 반대방향 쪽으로 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식당문을 열고 술청으로 들어섰다.

벌써 두 패의 술손님들이 식탁을 차지하고 있었다.

혼자 술청으로 들어서는 변씨에게 승희는 '통감자' 는 어디 두고 혼자 왔느냐고 물었다.

통감자는 승희가 지어준 봉환의 별호였다.

나중에 얘기하자고 얼버무리고 안면이 익숙한 어부들이 모여앉은 식탁에 끼어들었다.

오징어 채낚기 어선의 어부인 그들은, 배 팔아 말을 산 위인이 뱃놈들 식탁에 끼어들었다고 이죽거렸지만, 변씨는 공술 얻어마시려 왔다고 되받았다.

그러나 아이엠에프 시대에 흉어기까지 겹쳤으니 배를 말로 바꾼 용단은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변씨를 부추기는 축도 없지는 않았다.

중구난방으로 지껄이고 있는 말들을 듣고 있던 변씨는, "허우대도 반반하고 똑똑하다는 젊은 회사원들조차 하루가 멀다 하고 파리 목숨으로 모가지가 댕강댕강 떨어져나가는 판국에 아이엠에프 시대는 무슨 놈의 썩어빠질 아이엠에프 시대여,에프킬라 시대지. 아이엠에프란 말이 우리나라 말로는 국제통화기금이란 말인데, 이게 바로 구제금융이란 뜻이여. 그런데 바로 이 아이엠에프가 흡사 우리 경제를 망조들게 만든 원흉인 것처럼 얘기들 하고 있어. 집 지켜주는 사냥개를 똥 먹은 똥개 취급하는 거나 마찬가지지. 그러니까, 지금부터 모두들 에프킬라 시대로 불러. " "이봐, 변가.

그런 말로 선동하는 게 아닐세. 김대통령 청와대 들어가고난 뒤부터 한국은행 금고에 딸라가 수월찮게 쌓였다는데, 그런 식으로 매도하면 쓰나. " "씨발, 말이 좋아 딸라지 그게 우리가 장사 잘해서 번 돈인줄 알어? 천만의 말씀이야. 게다가 그 딸라라는 서양귀신은 우리들 맘대로 쓸 수도 없는 돈이여. 그 빛 좋은 개살구는 미국넘들이 구조조정 잘하라고 우리나라 은행에다 잠시 맡겨둔 돈에 불과해. 그런 돈이니까, 저늠들이 비윗장 틀어져서 저들 맘대로 돈통을 바닥까지 닥닥 긁어서 몽땅 빼내간다 해도 앙탈 한 번 못하고 구경만 하고 있어야 해. 돈통은 우리 은행에 있지만, 임자는 미국넘들이란 것을 알고들 있나? 돈통이 우리 은행에 있다고 미련하게 우리 돈으로 생각했다간 잘생겼다고 쓰다듬던 큰 코 다쳐. 경제각료들이 경제에 달통하고 초능력이 있고, 축지를 쓸 줄 알고, 둔갑장신에 능수능란하다 할지라도 깡두수란 사람 비위 한 번 건드리면, 국물도 없어. 우리가 그런 슬픈 운명을 가진 나라의 백성들이란 거 모두들 알고나 있어? 그런 것이나 알고 소주들 마셔. " "자네가 어선 떠나서 장돌뱅이로 나서더니 들은 풍월은 많아서 에프킬라 시대니 뭐니 떠들고 있지만, 수틀린다고 그렇게 비관적으로만 얘기할 건 아니잖여. 나나 자네나 뱃놈 땟국이 구질구질한데 뭘 안다고 입만 열었다 하면, 핏대부터 곤두세우나?"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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