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리포트]反나치투쟁 먹칠하는 新나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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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오는 9일은 러시아의 전승기념일이다. 러시아인들은 해마다 이날이면 살아 있는 전쟁영웅들을 칭송하며 2차 세계대전 때 그들이 치러야 했던 영웅적인 희생과 고통스러웠던 나치의 봉쇄를 상징하는 행사를 갖는다.

2천만명 이상의 희생자를 내면서 투쟁했던 러시아가 없었다면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나 오늘날의 서유럽도, 민주주의도 없었을 것이라는 게 러시아인들의 자부심이다.

하지만 이번 전승기념일을 앞두고 러시아에는 이상한 현상들이 발생하고 있다. 나치 독일을 숭상하는 러시아의 신나치주의자들이 극성을 부리는 것이다.

지난 4월20일 히틀러 생일때엔 이들이 1주일간을 아시아인 등 유색인종 살해주간으로 선정해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일부 지방도시에서는 사태가 더욱 심각해 공권력의 비호까지 받으며 외국인에 대한 시기심과 적대감을 신나치즘으로 위장, 표출시키기도 해 러시아 언론들이 큰 우려를 표명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한국.중국.대만.일본과 상당수 국민이 유색인종인 미국 등 각국 대사관이 공동으로 러시아 관계 당국에 항의했고 자국 국민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켰으나 신나치주의자들의 폭력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모스크바 미국 대사관을 지키는 흑인 미 해병대원이 신나치주의자들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해 이가 부러지는 등 중상을 입는 바람에 모스크바 외국인 사회는 더욱 위축돼버렸다. 더구나 현장에서 체포된 신나치주의 행동대원이 대학을 졸업한 인텔리인데다 자신의 행동에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확신범이란 점에서 외국인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러시아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을 세기말의 혼란과 공산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극심한 이념적 혼란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외국인에 대해 막연히 혐오감을 갖고 있는 러시아 사회 일부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특히 폭력행위의 방치가 나치에 대항해 숭고한 희생을 치른 그들의 선조들을 욕보이는 행동이라는 사실을 러시아인들이 깨달아야 할 시점인 것 같다.

모스크바 = 김석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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