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강위석 칼럼]70조원짜리 국민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우리나라 금융기관의 총 대출액은 약 7백조원이다.그 가운데 부실대출액이 실제로는 이미 1백조원에 이른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관계기관에 물어 보면 부실대출이라는 용어는 정의가 여러가지라서 그 진부를 확인한다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면서도 딱 잘라 부정은 하지 않는다. 세계은행의 한 전문가 보고서는 금융위기가 발생하는 것은 부실채권액이 총 대출의 15%를 넘는 것과 경험적으로 대략 일치한다고 밝힌 바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부실채권이 1백조원이라고 보면 총 대출의 약 15%가 된다.

부실대출액을 비관적으로 크게 추정하려고 할 것은 없다. 그러나 숫자를 줄이려는 쪽에 집착하는 낙관적 집계는 죽은 자식의 불알만 만지고 있기다.

1백조원이면 우리나라 한해 국민총생산액의 25%에 해당한다. 한보철강의 경우를 보면 총 부채가 약 7조원인데 원매자는 2조원 이상은 못 주겠다고 값을 매겼다.

그 바람에 거래가 성사되지 못하고 말았다. 다른 부실채권도 이런 비율이라고 추정하면 1백조원의 부실채권에 대한 담보물을 처분해 금융기관은 약 30조원을 건지게 된다.

나머지 70조원은 금융기관의 손실로 떨어야 할 판이다. 금융구조조정이 시원스럽게 진행되지 못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이 돈을 마련할 길이 없는 데 있다.

이 금액은 우리나라의 한해 정부예산과 얼추 맞먹는다.

이 돈이 나올 데는 국민의 세금 (국채발행을 포함) , 통화 증발, 내외국인에 의한 증자, 이 세가지가 있다.

통화증발이라고 하지만 현재 한국은행의 화폐발행고 잔액이 약 20조원에 불과한 것을 고려하면 이 방면에 큰 몫을 지우기는 어렵다. 얼마전 한국개발원과 한국금융연구원 이 한국경제의 구조조정은 금융기관의 구조조정에서 시작해야 한다, 기업구조조정에서 시작해야 한다를 놓고 대립한 일이 있었다.

정부는 지금 금융기관 구조조정을 먼저 하는 쪽으로 마음을 잡아 가는 듯하다.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금융기관부터 구조조정을 시작하면 일반 기업의 구조 조정은 고구마 캐듯 줄기를 따라 모조리 이뤄지게 된다. 부실 금융기관의 구조조정은 채무기업에 대한 부실채권 정리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구조조정의 내용은 대부분 법인을 정리해 주주뿐만 아니라 기타 채권자의 권리를 포기케 한 다음 자산을 매각하는 것이 될 것이다. 경영진은 물론 종업원도 모두 정리된다.

그 다음엔 새 주인이 새로 인원을 뽑게 될 것이다.

나머지는 법인의 증자나 내외의 다른 기업에 의한 인수.합병이 될것이다. 이렇게 하면 그 결과 금융기관은 부채에 비해 자산이 엄청나게 모자라게 될 것이다.

앞에 말한 70조원이 그 모자랄 액수에 대한 어림값이다. 부실채권이라는 것은 시체와 유사하다.

14세기에 페스트가 돌아 유럽의 어떤 도시는 인구의 30%가 죽었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에는 그 시체를 간략하고 신속하게 무더기로 장사하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전염병이 더 만연하지 않게 하려는 배려에서였다.

페스트 덕택으로 그때부터 유럽인들은 대규모 전염병의 무서움을 알게 됐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온 경제에 걸친 삶과 죽음의 싸움을 치르고 있다.

죽음의 기운이 삶의 원기를 능가해 퍼지면 조만간 우리 경제는 전체적 파국에 들어가게 된다.부실채권으로 표시되는 재무구조의 취약과 경쟁능력의 표시인 생산성의 미달은 도산과 실업이라는 죽음의 전염병을 퍼뜨리고 있다.

이 속에서 국제수지 흑자를 이뤄내고 신기술을 개발해 내고 있는 것은 삶의 원기다. 모든 죽은 것은 한 때는 팔팔하게 살아 있던 것이다.

그러나 죽은 것은 사실은 다시 살릴 수 없다.

미련을 가져서도, 희망을 걸어서도 안된다.

이것들의 장례를 치르는 데에 70조원이 드는 것이다.

내버려두고 있다가는 전혀 감당할 수 없는 선까지 그 액수가 점점 커질 뿐이다. 산 자와 죽은 자는 어떻게 가려낼 수 있는가.

금융기관은 국제결제은행이 요구하는 자기자본비율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죽은 자다. 일반 기업은 환평가손실을 제외한 금융 부채를 증가시키지 않고서는 기왕의 부채에 대한 이자를 갚지 못하면, 그리고 그런 기업만이 죽은 기업이다.

다른 부차적 기준을 곁들이다간 급속히 희귀해져가는 산 기업마저 죽이게 될 것이다.

강위석 논설고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