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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제3장 함부로 쏜 화살 ⑮

철규는 주문진으로 돌아오는 차중에서, 앞길이 평탄치만은 않을 것이라던 안씨의 말이 문득 뇌리를 스치긴 하였으나 격려 수준의 당부로만 새겨들었을 뿐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 인식의 강도는 태호도 마찬가지였으나, 윤씨는 그 말의 심각성을 얼추 꿰고 있는 편이었다.

도시의 건설현장에서처럼 건어물 도매에도 해결사가 있고, 하청업자도 있고, 청부폭력이 있다는 것을 윤씨처럼 닳고 닳은 부둣가 인생이 모를 턱이 없었다.

변씨는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이래로 줄곧 채낚기 어선을 타고 나가 조업에만 열중했었으므로 선창가 주변의 물정에는 어두웠다. 그러나 윤씨의 입장은 달랐다.

천성이 바다로 나가는 배타기보다 부둣가의 상인들과 어울리는 일에 구미가 당겼던 윤씨는 변씨와 비견해서 부둣가의 풍속에는 물리가 밝은 편이었다. 그가 안씨의 말을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전혀 내색하지 않았던 것은 안씨의 배려로 얻을 잇속에 차질이 생길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언제 닥칠지도 모를 일을 두고 지레 겁먹고 장사를 그르칠 것까지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주문진으로 돌아와 보니 변씨와 봉환은 다시 진부령 쪽으로 나가고 없었다. 옥산대의 휘닉스파크 들머리에 있는 식당들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산골마을로 산나물 채집을 나간 것이었다.

철규가 서울의 딸 정민에게 전화를 걸어본 것은 집을 떠난 이후로 그날 밤이 처음이었다. 정민이가 집에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밤 11시. 다행스럽게도 정민이 직접 전화를 받았다.

나 아버지야라고 말했을 때, 정민은 얼른 응대를 못하고 있었다. 송화기를 통해 들숨날숨이 불규칙한 숨소리만 들렸다.

어설픈 이별을 끝으로 진작 전화 한번 걸어주지 못했던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을 주체하지 못한 까닭이었을까. 아니면, 예상할 수 없었던 전화를 받고 순간적으로 당황했던 까닭일까. 거기가 어디냐는 상투적인 질문도 없었다. 아버지란 이름을 가진 철규가 먼저 오랜만이라는 건조한 몇 마디를 수화기 위로 흘려보냈다. 그러나 비 내리는 날, 연잎 위를 굴러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그의 말은 수화기 속으로 호소력있게 젖어들고 있지는 못했다. 전화로는 딸의 내심을 속속들이 꿰뚫어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수화기를 입에 바싹 들이대며, 아픈 데는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정민은 17살이 가지는 예민한 감수성이 감촉되는 한 마디를 겨우 흘리고 있었다. "왜 아프지 않겠어요. " 물리적인 병고를 겪지는 않고 있지만, 마음이 아프다는 얘기였다.

딸의 응대를 간곡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지만, 딸의 그 한 마디에 이번엔 철규가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왜 아프지 않겠어요라는 대꾸의 앞쪽이든 뒤쪽이든 아버지란 한 마디를 딸은 왜 놓치고 말았을까. 아버지의 배반을 염두에 둔 의도적인 어법이었을까 아니면, 우리 가족은 이미 반듯하게 돌아선 남남이란 사실을 일깨워주려는 고도로 세련된 어법을 구사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철규는 고개를 흔들었다.

딸의 천성으로 보아 그토록 은근하면서도 폭압적인 언어로 아버지의 배반을 난도질하고 들 아이는 아니었다. 공부는 잘하고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두렵더라도 그 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침잠의 한가운데 앉혀두고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지 못한 장본인이 어떻게 그런 말을 뻔뻔스럽게 할 수 있을까. 그러다가 예비된 적이 없었던 한 마디가 툭 불거져나왔다. 어머니는 잘 계시냐? 딸은 그렇다고 짧게 대답했다.

비로소 정민은 가늘게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입김이 서려 있는 송화기 언저리로 딸의 눈물도 함께 배어나는 것처럼 생각되었을 때, 철규는 한달에 한두 번 바로 이 시각에 전화하마 하고 전화를 끊으려 하였다.

그러자 곧장 딸의 다급한 목소리가 수화기가 터질 듯이 들려왔다. 아빠. 나 삐삐 샀어. 그러나 떨리는 목소리로 더 이상은 통화를 계속할 수 없었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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