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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여성시대’ 10년째 진행 양희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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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양희은씨는 ‘여성시대’ 방송 10년 동안 네 명의 남성 파트너와 일했다. 김승현·전유성·송승환씨에 이어 현재 강석우씨와 호흡을 맞추고 있다. 그는 “마치 탁구 게임을 하듯 파트너가 바뀔 때마다 내 목소리 톤도 호흡도 바뀌더라”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취기를 부르는 건 술만이 아니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사람을 취하게 하는 마력을 지녔다. 그의 목소리가 짙은 중독성을 품은 것도 같은 이치다. 그의 맨 처음은 ‘아침이슬’이었지만, 사람들을 취하게 한 건 노래만이 아니었다.

그는 데뷔 이후 줄곧 라디오 스튜디오를 지켰다. 가수로서의 세월과 라디오 DJ로서의 세월이 온전히 포개진다. 잘 빚어진 그의 목소리는 아무리 후줄근한 사연도 아름답게 둔갑시키곤 했다. 그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청취자를 울먹이게 했고, 웃게 했으며, 부르르 떨게 했고, 미끄러트렸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그의 목소리에 잔뜩 취했다. 그 시작이 1971년이었으므로, 어느새 39년째다.

◆‘여성시대’ 진행 10년=이쯤 되면 어렵지 않게 이름 석자가 튀어나올 테다. 양희은(57). 40년 가까이 노래를 불렀고, 라디오프로를 진행했다. 그의 이름에선 ‘아침이슬’을 지울 수 없지만, 스스로는 “노래보다 라디오를 훨씬 좋아했다”고 고백한다. 암 투병과 미국 생활을 제외하고서도 30년을 꼬박 라디오 프로 진행을 했다니 그 애정이 어지간하다.

11일이면 그의 지극한 라디오 사랑에 값하는 묵직한 상패가 주어진다. MBC 표준 FM 라디오 ‘여성시대’의 진행 10년째를 맞아 ‘브론즈 마우스’ 상을 받는다. MBC가 라디오 프로그램을 10년 이상 진행한 공로로 주는 상이다. ‘여성시대’ 방송 35년 만에 최초 수상자다. “인생이란 학교에서 많은 걸 배웠지만 ‘여성시대’가 가장 큰 스승이었어요. 청취자들의 구구한 사연을 통해 깨달은 게 많죠. 이 땅의 여성들에게, 애청자 누이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려요.”

그는 ‘여성시대’를 진행하면서 “라디오가 위로의 매체라는 사실을 실감한다”고 했다. 방송에 쏟아지는 사연은 하루에만 300여 통. 사연을 나누면서 함께 위로받는 게 ‘여성시대’의 마력이란다. “사연이 방송에 공개되면 가슴 속에 꽁하던 문제가 뻥하고 터지는 순간이 있어요. 비슷한 사연을 지닌 분들도 함께 아파하면서 위로를 받죠. 일종의 연대감이랄까요.”

‘여성시대’를 듣다 보면 웬만한 냉가슴도 울음을 누르기 힘들 때가 있다. 대체 어느 누가 ‘지갑에 4000원밖에 없어서 맘모스빵 하나로 아기 돌상을 차렸답니다’와 같은 사연에 눈가를 촉촉하게 적시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같이 울기 시작하면 사연을 전달할 수가 없어서 꾹꾹 누르죠. 그래서 목울대가 아프면서 골이 쑤실 때가 많아요. 울음을 삼켜가면서 사연을 읽으니 힘들죠.”

◆“라디오는 긴밀한 매체”=‘여성시대’는 서민들의 아픈 사연들로 빼곡한 프로다. 그래서 정치권에서도 귀를 바짝 기울이는 방송이다. 2004년 11월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직접 출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그리고 영결식에서 ‘상록수’를 부른 그로선 남다른 추억일 수밖에 없다. “참 이런 인연도 있구나 싶죠. 노 전 대통령이 당시 방송에 나와서 ‘무조건 행복한 건 손주들’이라고 말했던 게 기억이 나요. 다들 행복하려고 사는 건데…. 그 모습이 자꾸 오버랩되더라고요.”

인터뷰 말미에 그는 다소 의외의 말을 꺼냈다. 노 전 대통령의 노제에서 부른 ‘상록수’ 이야기를 한참 한 뒤였다. “노래로부터 늘 도망가고 싶었어요. 지금도 노래하는 걸 즐기지 못해요. 라디오 방송하듯 노래를 했으면 얼마나 더 멋진 가수가 됐을까요.” 이를테면 한 시대를 품은 ‘아침이슬’로 노래를 시작한 그에겐 거스를 수 없는 중압감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물어봤다. “노래와 라디오 가운데 선택하라면?”

“꼭 택하라면 라디오를 잡겠어요. 라디오에 대한 의리와 애정이 있어요. 일방적인 짝사랑이죠. TV는 시선을 빼앗기지만 라디오는 호흡 소리도 놓치지 않잖아요. 마음이 쉬면서 들을 수 있는 긴밀한 매체죠.” 그러므로 이렇게 말해도 좋겠다. 그가 혹 노래를 멈출 날이 온다면, 그 마지막 곡은 ‘라디오 찬가’일지도 모르겠다. 

정강현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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