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올빼미수사' 사실상 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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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검찰이 그동안 대형사건 수사의 상징이었던 '밤샘 수사' 를 사실상 포기했다. 이는 취임 때부터 인권보호를 천명해온 박상천 (朴相千) 법무부장관이 지난 3월 발생한 권영해 (權寧海) 전 안기부장 할복소동에 이어 지난달 23일 대검 중앙수사부 조사실에서 한솔제지 간부의 자살기도 사건이 발생하자 "참고인 등을 가능한 한 오전에 소환, 늦어도 자정 이전에 조사를 마칠 수 있도록 하라" 고 검찰을 강하게 질책한 데 따른 것이다.

김태정 (金泰政) 검찰총장도 지난달 29일 오후 이례적으로 대검청사 10층과 11층 중수부 수사관실과 조사실을 직접 둘러보고 적법절차 준수를 수사관계자들에게 지시했다.

이에 따라 서울지검 공안1부는 지난달 29일 북풍공작을 주도한 혐의로 박일룡 (朴一龍) 전 안기부1차장을 소환, 조사하다 오후11시쯤 일단 돌려보내 밤샘조사를 피한 뒤 다음날 다시 불러 구속했다.

대검 중수부도 지난달 30일 오전8시 김인호 (金仁浩) 전경제수석을 소환, 오후11시45분까지 조사한 뒤 돌려보냈다가 다음날 오전 다시 불러 조사했다.

중수부는 또 강경식 (姜慶植) 전 부총리를 1일 오전 소환조사하던 중 현역의원 신분으로 국회 개회식 참석을 요구하는 姜씨의 요구를 받아들여 개회식 참석을 허가한 뒤 오후3시30분 다시 출두시켜 조사를 하고 이날 밤 12시 이전에 귀가시켰다.

검찰이 이처럼 밤샘 조사를 자제할 수밖에 없는 또다른 이유는 밤샘조사로 받아낸 진술은 증거능력이 없다는 대법원 판결 때문. 대법원은 최근 수재 등 혐의로 불구속기소된 文모 (60) 씨 사건 상고심에서 "검찰이 30시간 동안 잠을 재우지 않은 상태에서 받아낸 자백은 자유로운 의사가 아니므로 증거능력이 없다" 고 판결했다.

그동안 일부 검사들은 "조사를 하다 중간에 멈추면 리듬이 끊어지기 때문에 자백을 얻어내기가 훨씬 어렵다" 며 밤샘 조사의 효율성을 주장해왔다.

법조 관계자들은 이번 기회에 '본인의 동의를 받았다' 는 명목으로 이뤄지는 밤샘조사가 근절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변협 관계자는 "고문행위와 다를 바 없는 수면 제한을 통해 피의자의 진술을 받아내기보다는 검찰이 과학적으로 증거를 확보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고 지적했다. 또 밤샘조사와 함께 출국금지.압수영장 남발을 통해 자백을 강요하는 관행도 사라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기업체를 수사할 때 경영진을 모두 출국금지하고 회계장부를 압수해 업무를 마비시켜 놓고 진술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 며 "출국금지나 압수수색이 자백을 받아내려는 강압용으로 이루어져서는 안될 것" 이라고 지적했다.

정철근 기자 〈jeconom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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