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대기업 구조조정 본격화 하반기 M&A 큰 장 서나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17호 24면

정부와 채권은행이 대기업 구조조정의 고삐를 단단히 죄고 있다. 자금 사정이 나빠졌거나 그럴 우려가 있다는 진단을 받은 금호아시아나·동부 등 9개 그룹이 주채권은행과 재무구조 개선 약정을 맺었다. 이들 그룹은 보유자산 매각 등을 통해 ‘건강체질’로 거듭나야 한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인수합병(M&A) 시장에 매물들이 줄줄이 나올 수도 있다. 기업 인수를 목적으로 하는 사모투자전문회사(PEF)들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대기업 구조조정 현황과 함께,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는 국내 M&A 시장의 움직임을 긴급 점검했다.

“아직 살아 있는 기업을 찾아가 ‘나라를 위해 먼저 죽어주셔야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재무구조 개선을 위한) 주채무계열 약정 대상 기업을 선정하는 과정은 공개적으로 할 수 없다.”

이창용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4일 한 세미나에서 이런 말을 했다. 기업 구조조정의 속도감이 떨어지고, 추진 과정도 불투명하다는 지적에 대해 ‘살아 있는 기업’과 ‘죽은 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고충을 토로한 것이다. 이 부위원장의 말처럼 외환위기 당시에는 실적 악화와 고금리에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거나 부실이 명확하게 드러난 기업들이 구조조정 수술대에 올랐다.

이미 뒤집혀 수면 위로 떠오른 죽은 고기였기에 굳이 부실기업의 이름을 감출 이유도 없었고, 너무 많아서 그럴 수도 없었다. 하지만 요즘 구조조정은 다르다. 일시적으로 자금 흐름에 문제가 생길 우려가 있는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선제적 구조조정’이다. 금융당국은 증시와 외환시장이 모처럼 안정을 되찾은 요즘이 구조조정의 적기(適期)라고 보는 것 같다.

대우건설이 31년간 입주했던 서울역 광장 맞은편의 ‘대우빌딩’. 금호아시아나그룹은 2006년 대우건설을 인수한 뒤 이 빌딩을 미국계 금융회사인 모건스탠리에 매각했다.

그래서 ‘살아 있는 기업’에 대한 예방주사를 조심스럽게 놓기 시작했다. 채권은행단이 지난달 말과 이달 초에 걸쳐 부실 우려가 있는 9개 그룹과 재무구조 개선 약정을 맺었지만 구체적인 그룹 이름을 공개하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지난주 잇따른 언론 보도로 9개 그룹의 면면과 재무구조 개선 약정의 개괄적인 내용이 공개됐다. 시장 반응은 무덤덤했다. 이미 충분히 예상됐던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대우건설 처리 7월 말로 연기
약정을 맺은 그룹 가운데 가장 주목받은 곳은 몸집이 가장 큰 금호아시아나그룹이었다. 2006년 빚을 내 무리하게 인수했던 대우건설이 화근이 됐다. 금호는 대우건설을 인수하면서 재무적 투자자들에게서 3조5000억원 정도를 지원받는 대신 올해 말까지 대우건설 주가가 3만1500원을 밑돌면 차액을 보전해 주기로 하는 계약(풋백옵션)을 맺었다. 대우건설의 5일 종가는 1만1900원. 풋백옵션이 행사될 경우 그룹은 4조원가량의 차액을 물어줘야 한다.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은 7월 말까지 대우건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말미를 줬다. 이때까지 새 투자자를 찾지 못하면 금호는 대우건설을 산업은행이 조성하는 사모펀드(PEF)에 넘기기로 했다. 금호 측은 “새 투자자를 거의 유치한 상태이기 때문에 대우건설을 재매각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지만 시장 반응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그룹은 금호생명 매각도 추진 중이다. 서울고속버스터미널 지분도 매각 검토 대상에 포함시켰다.

동부그룹은 합금철 제조회사인 동부메탈을 역시 산업은행이 주도하는 PEF에 팔기로 했다. 이미 실사를 마쳤고 막판 가격협상을 벌이고 있다. 시장에서 동부메탈은 7000억~8000억원 정도로 평가받는다. 동부의 현안은 동부하이텍의 재무구조 개선이다. 이 회사는 공격적으로 반도체 사업에 투자한 후유증으로 금융비용만 연 2000억원 넘게 쓰고 있다. 그룹 관계자는 “5월 들어 반도체 부문 실적이 크게 개선됐고 동부메탈 가격 협상도 이달 중 결론이 날 것”이라며 “조만간 동부하이텍 유동성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잦은 M&A로 자금난에 빠진 대한전선은 최근 3500억원 규모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 발행에 성공해 한숨을 돌렸다. BW 청약은 모두 1조3948억원의 자금이 몰리며 3.99대1의 경쟁률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였다. 대한전선은 지난해 말 서울 회현동 사옥을 950억원에 매각했고, 올 4월에는 상환우선주를 발행해 1000억원의 자금을 마련했다. 올 하반기에 트라이브랜즈·한국렌탈 등 비주력 계열사 10여 개를 팔고 부동산 개발 투자금을 환수해 총 1조원의 유동성을 확보할 계획이다.

동양그룹은 계열사 매각 대신 동양생명을 상장해 현금을 마련하는 방식으로 레미콘 판매업체인 동양메이저의 부채를 줄일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하이마트를 인수한 뒤 유동성 위기설이 나돌았던 유진그룹의 경우 하이마트를 상장해 자금을 확보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GM대우는 미국 본사가 파산보호를 신청한 뒤 새로 출발하는 신설 법인인 ‘뉴 GM’에 편입됐지만 자금 지원을 둘러싸고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과 샅바싸움 중이다. GM대우는 ‘뉴 GM’으로 가는 ‘통행료’ 조로 산은에 자금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 산은은 GM대우를 하이브리드카나 저연비 소형차 등 경쟁력을 갖춘 차종의 핵심 생산기지로 키운다는 구체적인 보장 없이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는 안 하겠다는 입장이다. GM 본사가 협상에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지 않을 경우 GM대우가 법정관리를 거쳐 M&A 매물로 나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매수-매도자 M&A 가격 차 심각
재무구조 개선 약정 대상이 아닌 그룹 중에서도 매물이 나올 수 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와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4일 부채비율이 높고 이자에 비해 영업이익이 적어 부실 우려가 있는데도 한진·두산·코오롱 등 몇몇 그룹은 채권단이 주도한 이번 구조조정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주장을 했다. 현대건설·대우조선해양·대우인터내셔널 등 ‘대어급 매물’도 대기 중이다. 이들은 자산 규모가 수조원대에 이르는 만큼 누가 인수하느냐에 따라 재계 판도가 바뀔 수 있다.

이렇게 쏟아져 나올 M&A 물량이 시장에서 제대로 소화되기는 당분간 어려울 전망이다. 지난해 9월 세계 금융위기가 터진 이후 M&A 시장은 빠르게 냉각됐다. 올 들어 실물경기 침체에도 증시가 살아나면서 기업을 파는 쪽이 한결 느긋해졌다. 가능한 한 제값을 받고 팔려는 것이다. 반면 주요 매수 주체인 PEF들은 기업가치 평가에 여전히 인색하다. 실물경기는 언제 나아질지 모르며, 경기가 반등하지 못하고 고꾸라져 복합 불황에 빠질 우려도 있다고 본다.

그래서 PEF들은 올 2분기 기업 실적에 주목한다. 2008년이나 올 1분기 실적은 환율 효과와 함께 위기 발생 이전에 구매한 원부자재 가격과 같은 ‘과거 원가’가 반영됐다는 것이다. 위기가 터진 이후 기업들의 실제 체력은 2분기 실적에나 본격적으로 반영될 것으로 본다. 그러니 높은 가격에 사려고 하지 않는다. 이처럼 매수자와 매도자의 가격 차가 크니 거래가 성사되기 힘든 분위기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두산그룹의 구조조정은 시장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두산그룹은 두산DST 등 3개 사 경영권과 한국우주항공산업(KAI) 지분을 페이퍼컴퍼니(SPC)에 전량 매각하기로 했다고 3일 발표했다. 매각 대상은 방위산업체인 두산DST와 버거킹 등 프랜차이즈를 운용하고 있는 SRS 코리아, 병마개 제조업체인 삼화왕관 등 3개 사와 두산인프라코어가 보유하고 있는 KAI 지분 20.54%다. ㈜두산이 설립한 SPC와 재무적 투자자인 미래에셋 PEF, IMM 프라이빗 에퀴티가 세우는 또 다른 SPC가 각각 51대49의 비율로 매각 지분을 총 7800억원에 인수하는 내용이다.

재무적 투자자들은 SPC에 2700억원을 출자했다. ㈜두산은 2800억원을 출자한 뒤 삼화왕관 사업부문과 SRS코리아 매각대금으로 1500억원을 돌려받는다. 순 출자액은 1300억원인 셈이다. 두 SPC는 차입을 통해 모자라는 인수대금을 마련한다. 두산인프라코어는 두산 DST와 KAI 지분을 팔아 6300억원의 자금을 확보하게 됐다. 이 돈은 미국 건설장비 업체인 밥캣 인수 과정에서 채권단과 맺은 대출계약 때문에 어려운 처지에 놓인 DII(두산인프라코어 인터내셔널)에 출자한다.
 
두산 딜은 시간을 버는 한국형 모델
두산 모델은 경영권은 유지하면서 사실상 증자 형식으로 지분을 매각해 자금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구조조정 압력을 받고 있지만 ‘알짜배기’ 회사를 시장에 선뜻 내놓지 못하고 있는 기업들엔 벤치마킹의 대상이 될 만하다. 매도자와 매수자의 시각 차를 ‘시간’을 두고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조조정이란 구호 아래 생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줄여주는 한편, 남 주기 아까운 우량회사를 나중에 제값 받고 팔 수 있는 기회를 남겨둔 것이다. 두산 딜(deal)이 협상을 시작한 지 2주일 만에 초스피드로 끝난 것도 서로 절충점을 찾기 쉬운 윈-윈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두산이 경영권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매각(true sale)이 아니라는 시각이 일부 있긴 하지만 활기 잃은 최근의 M&A 시장 상황을 고려할 때 불가피한 측면이 많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이 거래에 참여한 PEF인 IMM 프라이빗 에퀴티의 송인준 대표는 “두산 딜은 요즘 시장 상황에 잘 맞는 한국형 하이브리드 모델”이라며 “거래가 성사된 이후 PEF 투자에 관심 있는 은행·증권사들이 ‘두산처럼 함께 해보고 싶다’는 문의가 잇따르고 있다”고 말했다.

두산 딜의 또 다른 특징은 여러 개의 우량회사를 묶어 한꺼번에 내놓았다는 점이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매물로 내놓을 만한 좋은 회사들이 많지 않아 구조조정에 내몰린 다른 그룹들이 앞다퉈 ‘두산 따라 하기’에 나서기는 힘들 것”으로 분석했다.
 
롯데·포스코·SK 행보에 관심
PEF를 제외하면 주요 그룹 가운데 가시적으로 ‘기업 사냥’에 대해 열성을 보이는 곳은 별로 없다. SK나 롯데·포스코 등 상대적으로 ‘실탄’ 여유가 있는 기업들도 아직까지 M&A에 유보적이다. SK 관계자는 “비상경영 체제가 계속되고 있어 M&A에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연초 ‘처음처럼’ 소주로 유명한 두산 주류BG를 인수하면서 소주 시장에 발을 들여놓은 롯데 역시 “OB맥주 인수가 무산된 뒤 시장을 관망하고 있다”고 했다. 한화 관계자는 “(M&A를) 검토한 적 없다. 최대한 현금을 비축하겠다는 입장”이라고 했다.

다만 SK그룹의 신용카드 시장 진출, 롯데의 맥주 시장 진입 등은 여전히 관심거리다. SK텔레콤은 하나금융그룹과 제휴해 신용카드 사업에 진출, 하나카드(가칭)를 설립할 것으로 알려졌다. SK 측은 “확정된 사안은 아니다”며 한발 물러서고 있지만 업계에서는 ‘OK캐쉬백’ 사업 등으로 회원 관리 노하우가 풍부한 SK가 신용카드 사업에 뛰어들 경우 파괴력이 클 것으로 전망한다. SK는 2001년에도 전북은행 신용카드 부문 인수를 추진한 적이 있다.

M&A 시장의 ‘큰손’ 롯데의 행보도 눈여겨봐야 한다. 롯데는 연초 불과 20여 일 만에 두산 주류BG를 속사포처럼 인수해 화제가 됐다. 그 다음 곧바로 OB맥주 인수전에 뛰어들었지만 세계적인 사모펀드인 KKR에 한발 밀렸다. 그렇다고 발길을 아예 돌린 것은 아니다. 이후에도 일본 아사히와 제휴해 맥주 공장을 지을 것이라는 소문이 나돈다. 지난해 한화그룹이 중도에 인수를 포기한 대우조선해양의 향방도 관건이다. 재계에선 “결국 시너지 효과가 큰 포스코가 다시 관심을 갖지 않겠느냐”는 전망이 나온다.

굿모닝신한증권 길기모 연구위원은 “시장에서 구조조정 대상이라는 평가를 받는 일부 그룹이 M&A 시장에 기웃거리는 경우가 있었지만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며 “현금 동원력을 감안할 때 주요 그룹 가운데 M&A 여력이 있는 곳은 롯데·포스코·SK 정도”라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