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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즐겨 읽기] 말하는 코끼리, 벌레만 한 여인 … 현실 비추는 환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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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코끼리가 떴다
 김이은 지음, 민음사
312쪽, 1만2000원

초등학생 때는 이웃집 누나에 의해, 군에서는 고참병에 의해 성적 학대를 당한 S. 언제부턴가 발기불능이 되고 그에 따른 자신감 부족으로 입사시험에 번번히 떨어진다. 결국 대리운전사가 된 S, 마음의 병을 치유해준다는 상가 건물 지하 1층 ‘심율처(心汨處)’를 찾는다. 이곳 처방의 첫 단계는 눈을 가리는 것. 다른 감각에 비해 지나치게 의존도가 높은, 시각에서 잠시라도 벗어나라는 취지다. 시각이 막히니 과연 후각·촉각 등이 예민해진다. 이런 S에게 마음을 진정시키는 ‘일랑일랑’ 향이 제공되고 여(女)시술사가 맨가슴을 내맡긴다. 잘 쓰지 않던 감각기관들이 활성화된 탓일까. 잠잠하던 S의 남성, 깨어날 기미를 보인다.

소설집인 신간에 실린 첫 번째 작품 ‘가슴 커지는 여자 이야기-심율처:대체 의학 연구 사례’의 도입 부분이다. 남성 독자들을 달뜨게 할 ‘자극적’ 내용이지만 사실 치유 또는 치료 방편으로서 섹스라는 설정은 그리 낯설지 않다. ‘하수도’에 종종 비유되는 매춘산업이 남성 욕망의 비공식 배설을 통해 현체제 유지에 기여한다는 논리도 비슷한 연장선상에 있는 게 아닐까. 소설집을 읽으면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김씨가 어떤 식으로든 작품 안에 현실을 반영하려 한다는 점이다. 김씨는 리얼리스트일까.

소설가 김이은(36)씨는 “우리 세대는 ‘386’과 후배들인 디지털 세대 사이에 낀 세대”라며 “때문에 현실에 발 붙이면서도 분방한 상상력을 발휘하곤 한다”고 말했다. [민음사 제공]

김씨 작품의 ‘기질특이성’은 ‘가슴 커지는…’을 제외한 대부분의 작품에서 보인다. ‘외계인, 달리다’는 본 모습과 딴판인 사회적 자아의 모습, ‘페르소나’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실제 가면을 쓴 것으로 보이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맨 얼굴만 보여 고민하는 가면가게 여주인의 얘기다. ‘잃어버린 몸을 찾아서’에서는 386 운동권 동거남과 연하의 애인 사이에서 양다리 걸치던 여자가 벌레 크기로 작아진다. 김씨의 작품집은 현실을 발판으로 하되 판타지적 장치도 거리낌 없이 갖다 쓰는 일테면 ‘혼합형’인 것이다.

소설집에 실린 9편 중 압권은 역시 표제작이다. ‘코끼리…’는 코끼리를 대량으로 사육해 녹색 교통수단은 물론 집중 훈련을 통한 관광 자원으로도 활용하려다 코끼리들의 집단 탈출로 공황 상태에 빠지는 대도시, 서울의 얘기다. 주인공 S는 한 코끼리로부터 원 고향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얘기를 듣는다. 결국 당국은 도시 전체에 펜스를 설치해 코끼리를 격리하는 해결책을 택한다. 처음에는 여섯마리가 동물원을 탈출한 작은 사건이었지만 연쇄적으로 파장이 커지면서 걷잡을 수 없어지는 사태. 우리가 종종 목격해 온 ‘위기 관리 불능’ 상황 아닌가. 김씨는 “현실을 묘사하되 얘기가 우울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환상적 요소를 즐겨 활용한다”고 말했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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