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은 지음, 민음사
312쪽, 1만2000원
초등학생 때는 이웃집 누나에 의해, 군에서는 고참병에 의해 성적 학대를 당한 S. 언제부턴가 발기불능이 되고 그에 따른 자신감 부족으로 입사시험에 번번히 떨어진다. 결국 대리운전사가 된 S, 마음의 병을 치유해준다는 상가 건물 지하 1층 ‘심율처(心汨處)’를 찾는다. 이곳 처방의 첫 단계는 눈을 가리는 것. 다른 감각에 비해 지나치게 의존도가 높은, 시각에서 잠시라도 벗어나라는 취지다. 시각이 막히니 과연 후각·촉각 등이 예민해진다. 이런 S에게 마음을 진정시키는 ‘일랑일랑’ 향이 제공되고 여(女)시술사가 맨가슴을 내맡긴다. 잘 쓰지 않던 감각기관들이 활성화된 탓일까. 잠잠하던 S의 남성, 깨어날 기미를 보인다.
소설집인 신간에 실린 첫 번째 작품 ‘가슴 커지는 여자 이야기-심율처:대체 의학 연구 사례’의 도입 부분이다. 남성 독자들을 달뜨게 할 ‘자극적’ 내용이지만 사실 치유 또는 치료 방편으로서 섹스라는 설정은 그리 낯설지 않다. ‘하수도’에 종종 비유되는 매춘산업이 남성 욕망의 비공식 배설을 통해 현체제 유지에 기여한다는 논리도 비슷한 연장선상에 있는 게 아닐까. 소설집을 읽으면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김씨가 어떤 식으로든 작품 안에 현실을 반영하려 한다는 점이다. 김씨는 리얼리스트일까.
소설가 김이은(36)씨는 “우리 세대는 ‘386’과 후배들인 디지털 세대 사이에 낀 세대”라며 “때문에 현실에 발 붙이면서도 분방한 상상력을 발휘하곤 한다”고 말했다. [민음사 제공]
소설집에 실린 9편 중 압권은 역시 표제작이다. ‘코끼리…’는 코끼리를 대량으로 사육해 녹색 교통수단은 물론 집중 훈련을 통한 관광 자원으로도 활용하려다 코끼리들의 집단 탈출로 공황 상태에 빠지는 대도시, 서울의 얘기다. 주인공 S는 한 코끼리로부터 원 고향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얘기를 듣는다. 결국 당국은 도시 전체에 펜스를 설치해 코끼리를 격리하는 해결책을 택한다. 처음에는 여섯마리가 동물원을 탈출한 작은 사건이었지만 연쇄적으로 파장이 커지면서 걷잡을 수 없어지는 사태. 우리가 종종 목격해 온 ‘위기 관리 불능’ 상황 아닌가. 김씨는 “현실을 묘사하되 얘기가 우울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환상적 요소를 즐겨 활용한다”고 말했다.
신준봉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