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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산하 북녘풍수]11.이곳이 구월산이로구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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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황해도는 비교적 넓은 들판의 땅이다. 서해의 바다에서 시작한 저평 (低平) 은 남포와 은율을 거쳐 갑자기 우뚝 솟은 평지돌출의 구월산 (九月山) 을 만난다. 들판은 지배층을 상징한다. 평지돌출의 구월산은 그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다. 민중은 저항의 선봉인 구월산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당연히 들판 가운데 서지도 못하며 구월산과 들판이 만나는 점이지대에 의지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나라 마을 입지의 풍수적 골간을 이루는 배산임수 (背山臨水) 라는 것이다. 보수로 대변되는 들판에 대해 돌출되게 저항하는 산, 그 사이에 속해 부대끼는 민중이란 뜻이다.

그들에게는 정당한 저항이지만 반대로 보수적 지배계층의 입장에서 보자면 반역이 될 수밖에 없는 구월산, 세사의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이 그런 평지돌출의 성격을 가진 산의 품에 안겨 혁명과 개벽을 꿈꾸는 것은 마침내 산과 사람이 상생의 궁합을 이뤘음을 보여줌이다. 간혹 어떤 사람들의 경우는 더 나아가 그런 산에 깊이 파묻혀 신선을 꿈꾸기도 한다.

그것은 현실 도피이며 또 다른 이기심의 발로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자생풍수는 양생수기 (養生修己) 의 소박한 자연주의를 별로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구월산은 저항의 맥이 흐르는 한편으로 단군신화가 살아 숨쉬는 기묘한 민족주의적 특성을 가진 산이다. 이제 그 구월산을 찾아가는 길이다.

안악군 월정리에 접어드니 구월산 전모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불꽃같은 석봉들이 능선에 즐비한데 최고봉이 1천m에 채 못미치는데도 그 위용은 대단하다. 아마도 평지돌출의 산이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산이 마치 안악군을 휘감 듯 둘러치고 있어 옛말대로 안악이란 지명이 '구월산 안자락' 에서 유래했으리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구월산 자체가 서해의 바닷바람을 막아주기 위한 병풍의 긴 성처럼 안악.신천.재령 일대를 감싸주는 형세는 그것이 꼭 단군과 결부되지 않았더라도 주민들의 존숭 대상이 됐을 것이다. 아니면 그런 형세가 단군신화를 불러들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구월산이란 이름도 단군신화와 곧바로 연결이 된다. 구월산의 구는 우리 말로 아홉이고 월은 달이니 아달산, 즉 아사달산이 한자로 뒤집어져서 그런 이름이 나왔으리라는 것이다.

1994년 북한 문학예술종합출판사에서 발간한 '구월산 전설 (1)' 에 보면 "구월산은 원래 아사달이라 일컬어졌다고 고기는 밝히고 있다. 아사는 아침이란 이두 말이고 달은 산이란 뜻이니 아사달이 바로 구월산" 이란 내용이 들어있다.

그건 그렇고 구월산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우리나라 4대 명산에 대한 서산대사 휴정의 품평이다. "금강산은 빼어나지만 웅장하지 못하고, 지리산은 웅장하지만 빼어나지 못하다. 구월산은 빼어나지도 못하고 웅장하지도 못한데, 묘향산은 빼어나기도 하고 웅장하기도 하구나 (金剛秀而不壯/智異壯而不秀/九月不秀不壯/妙香亦秀亦壯) ." 비록 불수부장 (不秀不壯) 이란 표현을 쓰고 있지만 이것이 구월산을 폄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4대 명산 중 그렇다는 것이니 그 규모가 넷 중 가장 작고 높이도 그러하거니와 석골 (石骨) 이 드러난 악산이라 그런 표현을 쓴 것이지 구월산이 4대 명산의 반열에 드는 산이라는 점만은 분명히 해놓고 있지 않은가.

'동국여지승람' 이나 '택리지' 의 구월산 소개도 들어둘만 하지만 그런 것들을 아우른 것이 육당 최남선 (崔南善) 의 글이 아닌가 한다.

육당에 따르면 단군이 하늘에서 맨 처음 내려 온 곳은 묘향산이다. 조선을 세우면서 도읍을 평양에 두었다가 나중에 다시 구월산 아래 당장평 (唐莊坪. '여지승람' 에는 唐莊京으로 나오고 현지에서는 唐莊坪이라 함) 으로 옮겨 모두 1천5백년 동안 인간을 다스렸다.

마지막으로 구월산에 들어가 신령이 됐는데, 따라서 단군을 모시는 산도 묘향산에서 점차 구월산으로 옮겨지게 됐다는 것이다. "신천.안악을 거쳐 구월산에 다가가 보라. 멀리서는 정다워 보이고 가까이 가면 은근하고 전체로 보면 듬직하고 부분으로 보면 상큼하니, 빼어나지 못하다고 했지만 옥으로 깎은 연꽃 봉우리같은 아사봉이 있고 웅장하지 못하다고 했지만 일출봉.광봉.주토봉 등이 여기저기 주먹들을 부르쥐고 천만인이라도 덤벼라 하는 기개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산이 구월산이다." 육당의 표현이다.

정상인 사황봉 (思皇峰) 엔 모종의 시설물이 있는 듯해 이번에 오르지 못했다. 그 등성이에 있는 구월산성까지는 가 보았는데 아마도 해발 9백30m쯤 되지 않았나 싶다.

동쪽과 남쪽으로는 끝을 알 수 없는 들판이 펼쳐지고 서쪽으로 희미하기는 하지만 서해가 바라보이며 북쪽으로는 서해 갑문에 호수가 된 대동강 하구 (예전에는 이를 제량바다라 했다) 를 바라볼 수 있으니 그 장쾌함은 내가 본 어떤 산에도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

구월산은 유적 많고, 전설 많고, 꽃이 많아 삼다 (三多) 의 산이라 불린다. 특히 꽃 중에는 장미.두견화.나리꽃이 유명하다는데 계절이 겨울이라 얘기만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무척 아쉽다.

구월산의 풍취는 "아사봉 천궁에 귀를 기울여 보고, 단군대에 올라 천신의 유적도 더듬어 보고, 월산폭포에 몸을 씻고, 덕바위 위에서 사슴고기를 구우며 구월산 영지술에 취해보는 것" 이라 했지만 그 또한 침 흘리며 듣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구월산 아흔아홉 봉우리 중 남쪽 끝자락, 그러니까 지금의 황해남도 삼천군 고현리에 사람이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형상의 입구지봉이란 봉우리가 있다.

그런데 구월산 동쪽 들판 지역인 안악.삼천.신천.문화 고을 사람들은 농사만 지으며 살아왔으므로 수삼파령을 넘어 율천 (지금의 은율) 고을에 곡식을 내다 팔고 대신 그곳에서 물고기와 소금.농기구 따위를 사오곤 했다. 그러니 율천이 잘 살고 들판 사람들이 못사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을 터이다.

어느 해 노인 풍수쟁이가 이곳에 들렀다가 영리한 황부자집 며느리의 말을 듣고 그 이유를 구월산 입구지봉에 돌려댔으니, "저 봉우리가 사람 입 모양을 하고 신천.안악.문화 고을을 향하고 앉았는데 먹기는 이쪽 것을 먹고 뒤 (대변) 는 은율을 보고 하니 그럴 수밖에 더 있겠는가. 그 산봉우리에 올라가서 혀를 잘라버리면 다시 그런 일이 없을 것" 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풍수의 말을 따랐더니 과연 그리 됐더라는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느낀 것은 안악 쪽이 은율 쪽보다 좀 더 풍요로워 보이더라는 것인데, 기분탓인가, 아니면 그 얘기를 들어서인가 나도 모르겠다. 여하튼 구월산 동쪽은 유정 (有情) 한데 서쪽은 좀 음울한 인상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글 = 최창조·그림 = 황창배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다음회는 '구월산 월정사' 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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