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이강백연극제 '내마'…연극성 창조 기대 미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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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예술의전당 '이강백연극제' 의 첫번째 작품 '내마' 는 한편의 정치 야유극이다.작품의 사적 (史的) 배경과 담고 있는 내용이 모두 그렇다.넓게는 가상 정치세계의 풍자이고, 축소해 보면 권력의 단맛에 취한 허수아비 인간군상에 대한 조롱이다.

그 썩은 정치판에서 의연하게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이 주인공 내마다.그러나 그가 "세상은 외롭지 않다" 는 삶의 대원칙을 포기하고 끝내 "외롭다" 며 수구파들의 칼에 죽임을 당하는 순간 미래의 전망은 암울하다.

'내마' 의 이야기는 전형적 삼각구도. 마립간 (본격 왕 지도체제 이전 신라시대 왕을 칭함) 을 놓고 대립하는 눌지와 실성, 그 사이에 사초 (史草) 를 담당하는 기록관 내마가 있다.눌지는 귀족세력의 대표. 반면 실성은 강대국을 등에 업고 왕으로 옹립되는 인물이다.그러나 두 사람 다 폭압적 권력욕으로 무장된 '정치꾼' 이란 점은 같다.

연극은 이 두 사람이 벌이는 한바탕 폭력 놀이다.추대와 옹립, 실각이 교차되면서 그 와중에서 체념과 아부로 먹고사는 귀족들의 줏대없는 행태가 드러난다.실성의 말 한마디에 염소가 메뚜기로 둔갑해도 귀족들은 '예스' 만 연발한다.

한차례의 암살극. 정의의 사도 내마는 잠깐동안의 권력부재시 '민중의 영웅' 으로 부각된다.이런 설정만 봐도 '내마' 는 다분히 현실적 드라마다.풀어가는 기법은 세련된 우화와 풍자지만 '내마' 의 원초적 속성은 현실 지향적이다.그래서 이 작품이 초연 (74년) 됐을 때 유신시대에 대한 저항으로 읽힌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이다.그러나 시대가 변한 탓일까. '내마' 가 담고 있는 풍부한 정치적 알레고리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많이 퇴색.약화된 느낌이다.

비록 간접화법이긴 해도 현실에 지극히 밀착된 주제의식이 닳아 빠진 요즘 세상에 쉽게 노출됐기 때문이다.시대의 거울로서 이 작품을 보기엔 이제 구식패션이 돼 버린 것. 이것을 희곡의 생래적 한계 때문이었다고 치자. 다음 단계에서 연출가가 택해야 길은 무엇인가.

그건 이미 검증받은 희곡 혹은 작가의 무거움으로부터 과감히 벗어나 '연출의 생각' 을 담는 것이다.그러나 '내마' 는 오히려 작가의 무게에 눌려 '오이디푸스' 연작 등에서 보여준 김아라 특유의 풍부한 연극성이 갇혀 버리고 말았다.

전체적으로 연기는 리듬감이 없이 단조롭다.가끔 극중 청량제가 되는 아로 역의 노영화나 허약하지만 비굴하지 않은 내마 역의 박상종 정도가 도드라졌다.그러나 박동우의 무대는 여전히 최고다.

철제 서랍을 켜켜이 쌓아 세운 육중한 문서보관소는 개선되지 않는 역사의 순환을 적절히 암시한다.또한 귀족 회의실을 감청색 타일의 욕탕으로 개조한 재치는 고리타분한 원작의 분위기를 일신시킨 기폭제다.

"내마, 내마, 내마…" .코러스들의 이같은 애절한 음성이 극장 밖을 넘어 세상의 메아리로 과연 퍼져 나갈 수 있을까. '내마' 가 풀 숙제다.5월3일까지 자유소극장. 02 - 580 - 1880

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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