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죽음 이후의 몇 가지 어지러운 생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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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그는 죽어서 다시 태어났다. 5월 23일 이후 나라는 휴먼 다큐멘터리 ‘인간 노무현’으로 뒤덮였다. 그러자 ‘대통령 노무현’은 죽고 세상을 향해 분노했던 ‘서민 노무현’이 되살아났다. 서민들은 슬퍼했고 분노했다. 그러나 ‘대통령 노무현’이 ‘인간 노무현’을 감출 수 없었듯 ‘인간 노무현’도 ‘대통령 노무현’을 지울 수는 없다.

#그는 지역주의에 맞서 싸웠으나 패배했다. 노무현처럼 지역주의에 도전하는 ‘바보’는 그를 닮은 유시민을 빼고는 없다. 3김 시대가 끝나면 지역주의도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김영삼·김대중·김종필이 지배했던 영남·호남·충청은 박근혜·정동영·이회창이 차지했다. 그는 절망했다. 키르케고르는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 정치적 갈등을 완화시키려면 모든 정치세력이 자신들의 대표를 국회로 보낼 수 있어야 한다. 지역주의는 그걸 가로막는다. 지역주의를 끝내려면 선거제도를 바꿔야 한다.

#나탄 샤란스키는 『민주주의를 말한다』라는 책에서 ‘누구든지 광장 한가운데로 나가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의 견해를 체포, 구금, 물리적 위해에 대한 두려움 없이 발표할 수 있다면 그 사회는 자유사회다. 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공포사회다’라고 했다. 노무현의 탈 권위는 이미지가 아니라 실체다. 그는 광장에서 두려움 없이 비판할 수 있었던 대통령이었다. 광장은 신문·인터넷·방송, 그리고 실제 광장일 수도 있다. 정치적 견해는 자유롭게 보장되어야 하며 광장은 예단으로 봉쇄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봉쇄하는 것이다.

#누구나 정치적 견해를 객관적·중립적이 아닌 주관적·당파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포기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다. 다만 누구도 사실을 왜곡하거나 거짓말할 자유까지 얻은 것은 아니다. 그것까지도 옹호하는 것은 궤변이다. 집회 및 시위는 보장해야 하나 폭력은 처벌받아야 한다. 폭력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공권력은 법으로 위임된 물리력이다. 그러나 공권력도 평화적 집회에 대해 정당한 이유 없이 폭력으로 진압해서는 안 된다.

#검찰과 언론이 피의사실 공표의 공범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 검찰은 정당한 수사였다고 억울해한다. 전직 대통령이 수사 중에 자살한 것은 유감이지만 이를 빌미로 검찰을 흔들면 앞으로 어떤 사건을 수사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불법 행위에 대한 수사가 왜 잘못이냐고 강하게 반문하는 사람도 꽤 많다. 그 말도 맞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묻고 있는 것은 국세청·검찰이 전직 대통령을 왜 조사·수사했느냐가 아니다. 왜 그리 가혹하게 했느냐며 분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 역시 본질은 아니다. 비판의 핵심은 검찰과 국세청이 다른 사건, 다른 전직 대통령과 비교하여 과연 공정하게 했는가 하는 점이다. 언론에 던져진 비판도 마찬가지다. ‘법치’는 ‘칼’을 쓰는 권력기관이 공정하지 않을 때 무너진다. 대개 권력에 의한 법치의 훼손이 국민에 의한 훼손보다 훨씬 크고 자주 일어난다. 1980년대 ‘민주정의당’이 ‘정의사회 구현’을 강조한 것은 정권이 정의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법치’도 지나치면 의심받는다.

#김형오 국회의장이 제헌절이 있는 7월에 개헌을 본격적으로 논의하자고 했다. 개헌을 한다면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동시에 실시하는 것에 나는 반대한다. 만일 대통령의 임기를 4년 중임으로 한다면 국회의원 선거는 그 중간에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패배한 정치세력이 2년 만에 심판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대중의 인내심은 그 정도다. 4년은 너무 길다. 그래야 대중이 광화문으로 가지 않는다.

#미국 대선에서 패한 매케인은 “오바마는 나의 대통령이다”고 선언했다. 선거가 끝나면 대통령은 모두의 대통령이다. 이명박은 나의 대통령이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민주주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노무현도 나의 대통령이었다. 그의 유언에 따라 봉하 마을에 작은 비석 하나는 세우되 나는 그가 국립 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그는 대한민국의 16대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박성민 정치컨설팅 ‘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