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호르몬 피해실태]정자수 50년간 절반줄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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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후지 (富士) 산 부근에서 발원해 중화학공장이 밀집한 가와사키 (川崎) 시를 관통, 도쿄 (東京) 만으로 흘러드는 다마 (多摩) 강. 하네다 (羽田) 공항 옆 다마강 하구에서는 팔뚝만한 잉어들이 뛰노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일본정부는 한때 오염에 찌들었던 이 강을 하천 살리기의 모범사례로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강에 서식하는 수컷 잉어의 정소 (精巢) 이상 사례가 공개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20대 남성의 정자가 '무기력' 하다는 보고는 가뜩이나 인구감소로 고민하는 일본에 큰 충격을 주었다.

환경호르몬이 던지는 예언은 으스스하다.한마디로 인간이 스스로 내다버린 화학물질에 의해 수컷이 여성화되면서 결국 종 (種) 의 소멸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무시무시한 경고다.

인간이 현재 만들어내는 화학물질은 대략 10만종. 다이옥신이나 폴리염화비페닐 (PCB) 같이 인체에 직접 해를 끼치는 공해물질도 있지만 문제는 그동안 비교적 안전하다고 여겨져온 농약.계면활성제 (세제).플라스틱의 원료들이 체내에 들어오면 여성호르몬 (에스트로겐) 과 흡사한 작용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는 점이다.50년대까지만 해도 호르몬은 좋은 것으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60년 갓 태어난 쥐에 여성호르몬을 투여하면 암컷에는 자궁암, 수컷에는 전립선암이 빈발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호르몬 과잉의 부작용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판명된 환경호르몬은 67종류지만 얼마나 더 늘어날지 아직 예측할 수 없다.규슈 (九州) 대 농학부 오시마 유지 (大嶋雄治) 교수는 "미량의 환경호르몬도 두개 이상이 동시에 작용하면 생체에 큰 부작용을 일으킨다" 며 송사리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산란수와 수정률이 반감했다고 경고했다.

환경호르몬 피해가 본격적으로 보고되기 시작한 것은 91년부터. 세계자연보호기금은 야생동물을 조사한 결과 성기 이상이나 생식불능 개체수가 급증한 사실을 발견했다.

농약에 오염된 미국 플로리다주 호수에는 수컷 악어의 생식기가 퇴화돼 개체수가 급감했고 오대호 주변의 조류는 알껍질이 얇아졌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영국의 하천에서는 세제성분이 원인이 된 암수동체의 잉어가 대량 발견됐다.덴마크의 스카케벡교수는 지난 92년 "인간의 정자수는 지난 50년 동안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고 발표했다.

환경호르몬이 세계 3대 환경문제로 등장한 데는 96년 3월 고르본박사가 집필한 '박탈당한 미래' 의 출간이 큰 작용을 했다.고르본박사는 이 책에서 "수컷에 대한 환경호르몬의 공격이 이미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 며 "환경호르몬은 인체에 축적돼 수세대까지 영향을 미치며 일부는 불가역성 (不可逆性) 을 갖고 있다" 고 주장했다.일단 체내에 들어오면 완벽한 원상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일본 요코하마 (橫濱) 시립대 이구치 다이센 (井口泰泉) 교수는 "한국도 지난해 일본과 6개월 시차를 두고 다이옥신 공해소동을 빚은 사실을 기억한다면 환경호르몬 공해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 이라고 경고했다.

도쿄 = 이철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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