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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산하 북녘풍수]10.안악 3호 고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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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구월산 가는 길에 벽화로 유명한 '안악3호 무덤' 을 찾아보기로 한다.안악3호 무덤은 평양에서 자동차로 개성 고속도로를 40여분 달려 내려오다 황해북도 사리원 갈림길 (인터체인지) 을 빠져 나와 다시 1시간쯤 서행 (西行) 하다 보면 재령.신천 등을 거쳐 닿게 되는 고구려 왕릉이다.

사리원 갈림길을 나서자마자 만나게 되는 재령평야는 '나무리벌' 이라는 또다른 이름에 걸맞게 들판이 여간 크고 넓은 게 아니다.'나무리벌' 이란 먹고 남을 만큼 곡식이 풍성하게 나는 너른 들을 일컫는 말인데 그러고 보니 김제.만경을 싸안은 호남벌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오전10시45분 국보유적 제67호인 안악3호 무덤에 닿았다.

안악3호 무덤은 무덤칸의 규모와 그 벽화 내용의 풍부함에서 으뜸가는 고구려 왕릉으로 알려진 곳이다.얼마전까지만 해도 4세기 중엽 고구려에 내투 (內投) 한 중국인 동수 (동壽) 의 무덤으로 알려져 왔으나 근래 연구에서 고구려 21대 고국원왕 (故國原王) 의 능임이 새로 밝혀졌다고 한다.남한의 '국사대사전' 에는 고국원왕이 고구려 제16대 왕으로 돼 있는데 21대왕이라니 어찌 된 영문인지 알 길이 없다.물론 '삼국사기' 나 '삼국유사' 대로 한다면 고국원왕은 16대가 되고 21대는 문자왕이다.

고국원왕은 중국 북방민족에게 밀려 수도를 남쪽 환도성 (만주 지안현 퉁구) 으로 옮긴 사실이 있고 재위중 전연 (前燕) 왕 모용황 (慕容)에게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을 탈취당하는가 하면 어머니와 왕비까지 사로잡히게 한 비운의 왕이었다.재위 41년 (371년)에는 평양성을 공격해온 백제의 근초고왕과 맞서 싸우다가 적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참으로 안타까운 일생을 보낸 인물임에 틀림없다.

'무덤무지 (봉분)' 는 방대형으로 남북 33m, 동서 30m, 높이 6m다.무덤칸은 돌로 쌓았고 '문칸.앞칸.안칸.동서 두 곁칸.회랑' 등으로 구성돼 있다.입구엔 육중한 돌문 두짝이 달려 있는데 안내원 선생은 "각각의 무게가 9백㎏으로 지금도 여닫힘이 매끄러운 베어링식 문짝" 이라고 설명했다.

벽화는 인물 풍속도로 돌벽 위에 직접 그린 것이다.벽화 중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 등장하는 행렬도인데 주인공이 탄 소수레 앞의 성상번 깃발을 통해 그가 고구려 왕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문칸에는 위병이 서있고 서쪽 곁칸에는 '백라관' 을 쓰고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사람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왕의 무덤임에는 의심이 여지가 없는 듯하다.

앞칸에는 호위 병사와 고취대.수박희 (손치기 씨름)가, 그 천장에는 해와 달, 그리고 영생도와 지하 천궁이 그려져 있다.49년 발굴 당시 안칸에서는 부부로 추정되는 두 사람분의 유골이 출토됐다고 한다.거기엔 왕이 대신을 거느리고 정사를 보는 모습, 동과 남에는 왕비가 시녀를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동쪽 곁칸에는 '육곳간 (푸줏간)' 이 그려져 있다.통돼지.개 같은 가축에 부엌 풍경도 보인다.우리 일행은 벽화에 그려져 있는 개를 두고 "개냐, 노루냐" 로 잠시 입씨름을 벌였지만 대부분 개라는 데 동의하는 분위기였다.우리 민족이 옛날부터 개를 식용으로도 썼다는 얘기가 되는 셈이다.

색채는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으며 벽화 중 영화 (永和) 13년이란 글자 때문에 무덤 주인공에 대한 구구한 해석이 있었으나 동수라는 이름의 그는 중국 요동지방 평곽현 경상리 사람으로 벼슬을 살다 69세에 죽었다고 돼 있으며 그가 안칸 문지기 그림 아래 있는 것으로 보아 당연히 무덤의 주인은 아니라는 게 북한학자들의 주장이다.

리정남선생은 고국원왕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그는 고국원왕이 재위 41년 동안 줄곧 남진정책을 써 임진강과 예성강을 국경으로 삼았는데 당시 안악지방은 양악이라 해 고구려의 속국이었다는 것이다.

고국원왕은 지금의 황해남도신원군아양리에 부수도 (副首都) 로 남평양 (南平壤) 을 두고 백제를 공략하다가 전사해 이곳에 묻히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그의 주장인 듯했다.지금 안악3호 무덤 주변은 '어로리 (魚蘆里) 벌' 이라는 넓은 '벌방 (들판)' 이기 때문에 이 상태로 풍수를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현장에서의 내 최초 판단이었다.한데 안내원의 얘기를 듣다 보니 뭔가 이상했다.그래서 과거 지세를 묻다가 중대한 사실을 알게 됐다.

안악3호 무덤 뒤 북쪽으로 15m쯤 되는 솔밭 둔덕이 보이고 거기서 3호분까지는 명백히 맥세가 이어져 있다.즉 산에 기대 터를 잡은 것이 분명하다는 뜻이다.그 둔덕에서 안악 읍내까지는 6㎞ 정도인데 계속 주변 평지보다는 약간 높게 이어지는 어떤 맥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나머지 동.서.남쪽은 바다였다는 것이 아닌가.그렇다면 이 무덤은 안악에서 길게 남자의 성기 모양으로 바다로 돌출된 끝 부분, 말하자면 귀두부 (龜頭部)에 터를 잡은 셈이 된다.이는 우리 자생풍수가 즐겨 찾던 자리잡기 방식으로 나로서는 중요한 예를 하나 더 얻는 행운을 누리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곳이 과연 바다였겠느냐는 점이다.올해 70세인 안내원 위선생은 어렸을 때 동양척식회사가 이곳을 개간했다는 말을 들었고 일부 공사는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고 한다.완벽한 바다일 수는 없으나 바닷물이 들어올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겠다는 건 현지인의 증언 뿐 아니라 지도상으로도 판단이 가능했다.

재령강의 지류인 서강은 석당리 수문을 통해 이 지역 관개를 하게 되며 이 일대는 워낙 해발고도가 낮아 과거 저습지였음에 틀림없다.평양에 조성된 은파호나 장수호가 해주만 쪽으로 연결되는 것을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게다가 흙은 지금도 조금만 파면 갯벌 흙이 나올 정도라는 것이다.앞의 황개천은 서강과 연결돼 있고 평양과 가까워 교통이 편리한 데다 당시는 뱃길까지 가능했으니 남진정책의 거점으로 손색이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동쪽으로 정방산, 북쪽으로 양산대, 서쪽으로 구월산, 남쪽으로 장수산과 수양산이 있는데 모두 해발 9백m 급으로 사방 수호에도 매우 유리하니 금상첨화란 얘기다.자생풍수의 희귀한 예를 안악에서 다시 만난 셈이다.

글 = 최창조·그림 = 황창배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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