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행의 옴부즈맨칼럼]신문의 날 연설 크게 다뤘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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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주는 이른바 신문주간이었다.7일의 '신문의 날' 을 전후해 각 신문에선 '자기 반성' 을 위주로 특집을 꾸민 것이 두드러졌다.오늘날의 신문이 당면한 위기적 상황에 비추어 그런 특집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법하다.

한데 '신문의 날' 자체의 행사와 관련해서는 거의 모든 신문들이 한결같이 '한장의 사진' 을 중심으로 한 행사스케치로 기사를 마무리했다.물론 이런 보도태도는 두가지점에서 긍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하나는 예년에도 '신문의 날' 행사 기사는 사진중심으로 다룬 것이 관례처럼 됐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신문의 날' 기사를 크게 다루지 않은 것은 겸양의 미덕이라고 지적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그러나 올해의 '신문의 날' 행사를 예년과 같은 차원에서 다룬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 내가 받은 느낌이다.나는 특히 기념행사에 참석한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의 즉석 연설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는데, 그 연설 내용은 마땅히 신문이 중시하고 비중있게 다뤘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흔히 대통령이나 권력자의 말을 크게 다루거나 평가할 경우 그것을 일컬어 '용비어천가' 의 판박이쯤으로 치부하는 것이 우리 언론계 내부의 성향이기도 하다.하지만 만일 그런 이유로 金대통령의 '연설' 을 소홀히 했다면 그것처럼 어처구니없는 일도 없을 터이다.왜냐하면 金대통령의 연설 내용은 그런 기우를 말끔히 씻어 낼 수 있는 가치를 지닌 것일 뿐더러 그것은 비단 언론인들 뿐만 아니라 국민 일반에게도 알려야 할 일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 연설이 사전에 인쇄된 '보도자료' 로 제공된 것이 아니라 즉석으로 행해진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소홀히 다뤄졌다면 그것은 신문이 지닌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낸 한가닥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설령 그런 이유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거기에서 제기되는 것은 뉴스 편집에서의 '가치판단' 문제다.가치판단을 소홀히 하거나 잘못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 신문 자체의 위상을 흔들어놓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金대통령의 연설은 비록 짧은 것이긴 했지만 지난 1백년의 우리 신문 역사를 회고하면서 그의 신문관 (觀) 을 뼈대있게 밝힌 것이었다.비단 '관' 뿐만 아니라 신문과 정치의 이른바 '협조관계' 에 대해서도 그의 솔직한 입장을 털어놓은 것이기도 했다."토머스 제퍼슨은 신문없는 정부를 택할 것인가, 정부없는 신문을 택할 것인가에 정부없는 신문을 택하겠다고 말했습니다.나도 정부없는 신문을 택하겠습니다" 라고 밝힌 것이라든가, "비판없는 찬양보다 우정있는 비판이 중요합니다.우정있는 비판을 하고, 잘못하면 충고해야 합니다.잘한 것만 잘했다고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대통령이 그런 말을 듣고 싶어하면 안됩니다" 라고 한 말은 신문에 기록으로 남겨야 할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도 남는 것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이런 내용을 중심으로 한 金대통령의 연설에서 내가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은 우리나라의 언론과 정치의 관계가 올바른 자리로 정립되는 것이야말로 시급하고도 중요한 과제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물론 IMF사태로 빚어진 전반적인 위기상황에서 언론과 정부 또는 정치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 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없을 성싶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 있을수록 언론이 직면한 이른바 '경영의 위기' 가 '언론자유의 위기' 를 초래하는 것이어선 안된다는 인식의 공유가 언론과 정치에 다 함께 있어야 하리라 믿는다.

경영적인 측면을 떠나 말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언론은 스스로의 자존과 자립을 위한 바른 자리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되씹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가령 언론계 내부의 문제를 스스로 풀려하지 않고, 정부의 개입을 촉구하거나 외부의 힘을 빌려 해결하려는 구시대적 발상이나 행동이 뜻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을 지양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는 깊이 반성해야 할 과제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사실 이런 것들이 지양되지 않고는 참다운 뜻에서의 '언론의 자유' 란 무색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이 점에서 '언론의 자유' 는 외부적 제약의 극복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내부적 요인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해두고 싶다.아울러 오늘날의 언론은 그 자체가 곧 정치라는 착각이나 망상 속에 있어서는 안될 줄 믿는다.언론인이 정치인이 아닌 것처럼 언론이 결코 정치일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정치인이나 정치집단은 어떤 의미에서든 권력을 잡기 위해 행동한다고 규정지을 수 있다.그렇다면 기자나 언론기관은 어떻게 규정해야 할 것인가.그것은 한마디로 국민 대중에게 권력을 두기 위해 사태를 파악하고 진실을 알리는 게 본령 (本領) 이라고 할 수 있다.

신문기자와 정치인은 분명 같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셈이다.이것은 결국 판단의 잣대나 성공의 기준이 정치인과 언론인이 같을 수 없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언론과 정치는 어떻게 '협조' 해야 할 것인가.그것은 서로의 거리와 차이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긴장관계의 중화 (中和)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지난날처럼 언론과 정치의 가치체계 혼돈이나 탁기 (濁氣) 로 가득찬 관계는 결코 되풀이돼선 안될 일이다.

이규행〈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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