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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포커스]'일본 붕괴설' 정확히 알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19년전 미 하버드대의 에즈라 보겔 교수가 썼던 'Japan as No.1' 의 일본 예찬론은 빛을 잃어가고 있다.일본의 국가 시스템이나 경제사회 시스템이 너무 낡아 이곳저곳에서 펑크나고 있다는 자아비판이 일고 있다.일본이 직면하고 있는 전후 최악의 실업률과 기업 도산사태를 보고 서구의 언론들은 일본이 위기상황이라고 보도하고 있다.엔화 가치나 주가가 떨어지면 그 시각은 더욱 비관적으로 흘러가 '붕괴직전' 으로 다뤄진다.

일본의 위기는 어느 수준인가.일본의 대외자산은 8천억달러, 외환보유고 2천억달러, 대외채무는 제로, 무역흑자 1천25억달러, 거기에다 저축률은 여전히 높다.미국은 저축률이 낮고 무역적자폭은 1천7백억달러에 이르고 있다.그런데도 미국은 7년째 경기 상승세를 타고 달러강세의 위력도 만만치 않다.

일본은 불황의 늪에 빠져 엔화도 맥을 못추는 상반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미국은 규제완화에 힘입어 금융.정보.통신분야 등 제3차 산업혁명에서 엄청난 부가가치를 쌓고 있다.일본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금융.건설.유통업계의 도산사태를 맞았다.주가가 2백엔 (약 2천4백원)에도 못미치는 건설회사가 20개사, 3백엔 (약 3천6백원) 이하에 머무르고 있는 은행도 20개사에 이를 정도다.

일본은 시장경제인가.정부의 재정재건정책이 빗나가 주가가 떨어지면 증시부양책을 쓰는 나라가 일본이다.주가를 떠받치기 위해 정부가 각종 기금을 투입한다.정치권의 입김이 작용한다.증시의 유언비어가 너무 심하다 싶으면 단속령이 내려진다.분식결산이 말썽이 돼 기업과 투자자간의 분쟁도 일어난다.일본도 아직은 불투명한 시장경제국가다.

일본은 안정된 국가인가.일본은 버블경기 붕괴 이후 1년 내내 위기설로 한달을 보내고 또 다음달을 위기설로 맞는다.위기의 체질화다. 20세기말 격변기에 정치권은 선거구의 지역사업에 몰두한 채 정책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정치 무능을 비판하기 위해 일본언론은 '외세' 를 이용한다.서구언론은 이를 받아 대일 (對日) 비판을 증폭시킨다.일본은 이와같이 위기 속에서 구조조정을 하며 안정을 찾는다.

일본은 왜 견제당하는가.일본이 고도성장기에 들어선 60년대 이후 대미 (對美) 마찰의 역사는 시작됐다.아시아 금융위기 직후 일본이 구상했던 아시아통화기금 설립안은 미국의 견제로 초반에 무산됐다.인도네시아.태국.한국에 대한 일본의 금융지원 규모는 미국보다 훨씬 크지만 생색조차 못내고 있다.

아시아에서 일본의 엔화 세력권이 형성되는 것을 미국은 우려하고 있다.미국을 극복하려는 일본의 도전적인 정치가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일본의 장래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일본이 추진하고 있는 각종 개혁은 속도가 느리지만 그러나 매우 탄탄하다.개혁의 중심이 관 (官)에서 민 (民) 으로 이동하면서 국민의 창의력도 최대한 발휘될 것이다.

과거에 없었던 16조엔 (약 1백92조원) 규모의 경기부양책은 설비투자 확대와 소비증대로 이어져 올해 마이너스 성장을 할 것이라는 당초의 예상을 깨게 될지도 모른다.

일본경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주요 이슈들이 이중성 (二重性) 을 띠고 있다.위기를 보는 시각이나 국가 및 기업에 대한 신용정보들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상황이 복잡해졌다.미국은 지난 1년 내내 일본에 내수확대를 요구해 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요구수준도 높아진다.

결국은 소비세율 인하를 주문하기까지 했다.미국은 '세계경제의 활성화' 를 위해서라지만 실은 정치문제화한 대일무역적자 축소가 목적일 것이다.미국의 일본 길들이기와 아시아의 대변자가 되고 싶어하는 일본의 대미 저항이 음모론을 낳았다.

지난해 12월에 일부 외국언론이 관성적으로 한국문제에 접근하면서 '붕괴론' 을 사실 이상으로 과장 보도했을 때 한국은 이미 종말을 맞이한 것으로 다뤄졌었다.정보의 편식이나 잘못된 선입관으로 한쪽만을 들여다보면 오판을 하기 쉽다.

최철주〈일본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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