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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전 대통령 영결식 날에도 북한군 소대 DMZ서 지뢰 매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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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고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이 치러진 29일, 최전방 비무장지대(DMZ) 담당 부대에는 일제히 조기가 걸렸다. 국민장으로 치러지는 노 대통령에 대한 예우였다. 경건하고 슬픈 분위기에 잠겨야 했던 이날 오전, 그러나 중부전선 15사단의 담당 DMZ 작전 지역에는 비상이 걸렸다.

무장한 북한군 소대 병력이 DMZ로 들어와 군사분계선(MDL) 쪽으로 내려온 것이다. 사단 수색대대에 즉각 비상이 걸렸고 준비된 대응 조치가 시작됐다. 남방한계선의 철책 통로로 긴급히 대응 병력이 투입됐다. 교전 사태에 대비, 실탄을 휴대해 즉각 전투에 임할 수 있는 병력이었다.

15사단 관계자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노 대통령 영결식 날 이렇게 하다니…. 하긴 김정일이 조문을 보내면서 동시에 핵실험을 하는 판이니 뭘 기대할 수 있겠나”라고 냉소했다. 이날 실제 전투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북한군은 MDL 북측 지역에 장애물을 설치하고 지뢰를 매설하는 작업을 했다.

국방부 관계자는 “요즘 DMZ 일부 지역에서 북측의 활동이 강화됐다”며 “북한군 수십 명씩 북방한계선을 넘어 MDL까지 접근하면서 장애물을 추가로 설치하는 등의 활동이 있다”고 했다. 사단마다 다르긴 하지만 15사단 관계자는 “요즘 툭하면 북한군들이 내려와서 엉뚱한 일을 하는 경우가 늘었다”고 경계했다. 그는 “사단 관할 지역 맞은편 북측 지역인 하진현 벌판으로 북한군이 수십 명씩 나타나는 일이 눈에 띈다”고 했다.


북한 ‘표식물 옮겼다’ 시비도

이런 북한군의 행동에 대한 국방부의 판단은 유보적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15사단에 그런 일이 있었던 게 사실”이라며 “북한이 DMZ 일대의 병력을 전진 배치시켰고, 최근 들어 활동 상황이 많아지긴 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북한군이 도발한 것이 아니며 특이한 행동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판단을 말했다. 사실 북한군의 행동이 반드시 ‘정전협정 위반’은 아니다. 장애물 설치 또는 보수 같은 일은 지난해에도 해오던, 연례 행사 같은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군이 이런 움직임을 보이다가 순식간에 도발로 나올 가능성이다.

한국의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 참여에 대해 북한이 ‘조선반도를 전쟁상태로 몰아넣었다’고 선언한 마당에 북한군의 동향을 ‘예전과 다름없다’며 한가하게 볼 수만은 없다는 지적이 있는 것이다. 북한군 판문점대표부가 27일 “PSI 참여로 서해상에서 한·미군 함정 및 민간 선박의 안전 항해를 담보할 수 없다”는 성명으로 우리 군의 관심을 서해로 돌린 뒤 육지에서 기습 도발해 허를 찌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한은 군사분계선에서 우리 측의 사소한 행동을 구실로 초소를 향해 총격행위 등 도발에 나설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북한 중앙통신은 4월 22일 “최근 전선 동부 군사분계선 표식물 제0768호를 남측 군이 북쪽으로 수십여m나 옮겨다 꽂는 엄중한 군사적 도발행위를 했다”며 “이는 정전협정에 대한 난폭한 위반이며 군사분계선 일대의 정세를 더욱 긴장 격화시키기 위한 고의적이며 계획적인 책동”이라고 비난했다. 성명에 나온 표식물이 있는 지역은 15사단 관할이다.

15사단 이용광 사단장은 북한의 성명에 대해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했다. 이 사단장은 “철저한 대비를 위해 DMZ 내 순찰 강화 조치를 했을 뿐 표지물을 옮기는 행위 등은 일절 없었다”고 했다. 15사단 관계자도 “이들 표지물은 북한이 관할하는 것들”이라며 “평소 너무 관리하지 않아 완전히 녹이 슬 정도인데 그걸 남측이 옮겼다고 하는 것은 그래서 억지 주장”이라고 했다.

그러나 문제는 “표식물을 되돌리지 않을 경우 자위적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한 북측의 협박이다. 언제든 자기들 마음대로 구실을 만들어 공격할 수 있다는 선전포고나 마찬가지다. 서해뿐 아니라 육상에서도 북한의 도발 가능성에 경계심을 높여야 할 상황인 것이다. 군은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를 전후로 서해 북방한계선(NLL) 외에도 MDL,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등에서 도발할 것으로 예상하고 대비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밤이나 비오는 날엔 포착 힘들어

핵실험과 관련된 북한의 ‘교묘한 전술’을 고려하면 그럴 필요성은 더 커진다. 최근 북한의 핵실험과 관련, 군 관계자는 “한국과 미국이 모두 북한의 작전에 한 방 먹은 꼴”이라고 했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는 당일까지도 한·미는 양쪽 모두 실험을 한 ‘풍계리’의 동향을 몰랐다는 것이다. 미국의 위성 사진은 현장에서 북한군 병사 몇 명을 찍는 정도에 그쳤을 뿐 핵실험을 할 만큼 ‘이상한 움직임’이 전혀 포착되지 않았다. 군 관계자는 “북한이 전적으로 동굴 속에서 작업을 했으며, 지상작업이 필요할 경우 위성 포착이 어려운 밤이나 흐린 날, 비오는 날을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따라서 북한의 육상 도발도 예측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 때문에 한미연합사는 북한군에 대한 감시태세인 워치콘(WATCON·3단계)을 2단계로 높였다. 북한군의 도발 가능성에 대비해 움직임을 정밀 감시한다는 것이다. 워치콘을 2단계로 격상하면 오산 미 공군기지에 배치된 고고도정찰기인 U-2기와 RC-135 정찰기 등 모든 정찰감시 자산의 출격 횟수가 두 배로 늘어난다. 북한 상공을 지나가는 정찰위성도 북한의 감시지역을 두 배 이상 자주 촬영한다. 이와 함께 군 당국은 대비 태세를 강화해 놓고 있다. 북한이 도발하면 현장 지휘관의 판단에 따라 지상·공중·해상의 합동전력으로 단시간에 현장에서 종결하라는 지침도 하달된 상태다.

15사단의 바로 앞 월봉산과 주변의 봉우리들은 속살이 드러날 만큼 깎여 있다. 북한군이 화전을 일구느라 불을 놔서 그렇게 됐다. 거기에 채소를 심어 먹는다. 겉으로 드러난 그런 모습은 측은할 지경이다. 최근 북한군은 전방에까지 하루에 한 끼분 식량만 공급되고 나머지는 현지 부대가 알아서 자급자족하고 있다. 그러나 월봉산 뒤쪽에 숨어 있는 북한군 진지의 지하벙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것이다.

5월의 해가 빛을 잃어가며 서쪽으로 넘어가는 28일 저녁 7시쯤 15사단 번개부대 1대대 3중대 17소초 막사 앞. 철책 근무를 나가는 소대 병력 앞에서 최모 중위가 투입 교육을 실시했다. 교전수칙과 투항자·침투자 식별 요령 등에 대해 사병들에게 일일이 묻고 확인한다. 사병들이 우물거리면 다시 가르쳐 주거나 반복시켜 숙지시킨다. 그러면서 “최근 북한의 핵실험과 우리 정부의 PSI 참여 등으로 군사적 긴장이 조성되고 있으므로 철저히 근무에 임하라”고 교육한다. 교육이 아주 꼼꼼했고 뜻밖에 길었다.

철책에는 ‘최근의 상황’이 이미 깊숙이 전달돼 17소초 식당에도 ‘북한의 핵실험 등에 따른 경계강화 지시’가 붙어 있다. 전군 경계강화 지시에 따라 지휘관들은 부대 밖 출입이 통제된다. 1대대 곽모 중위의 본래 업무는 정훈이지만 비상시기에 그런 구별은 무의미하다. 철모를 쓰고 상황실 근무를 하며 완전 전투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다.

교육과 점검을 마친 소대는 2개 조로 나뉘어 첫 투입조는 그때부터 오전 1시까지 철책 근무를 선다. 나머지는 그때까지 잔다. 투입조를 따라 나섰다. 빛이 아직 남아 있는 가운데 10여 명의 병사들이 세심하게 철책을 점검한다. 경계태세가 강화된 만큼 손도 긴장된 듯하다. 철책에 끼워놓은 돌을 잘못 만져 떨어지자 얼른 주워 끼운다.

동작 하나하나에 긴장감이 숨어 있다. 어떤 초소에서는 병사들이 클레이모어 선을 연결한다. 완전히 실전 태세다. 이윽고 캄캄해졌다. 철책선을 따라 나 있는 통로를 따라가는데 빛이라곤 하나도 없어 자꾸 발이 걸려 넘어지려 했다. 안내 장교와 개별 이동을 하는데 갑자기 “정지,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암구호’라는 소리가 시커먼 어둠 앞에서 들려온다. 암구호를 대지 못했다가는 그대로 총알받이다.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K-3 기관총을 겨눈 병사가 칠흑 속에 몸을 숨긴 모습이 흐릿하게 눈에 들어온다. 휴전선 155마일이 다 이렇다.

멀리 북을 바라본다. 남쪽, 북쪽 모두에서 빛이 사라지고 시커먼 공간만 입을 딱 벌리고 있다. 제법 시간이 흘러 멀리 어깨를 맞댄 7사단에서 점점이 빛이 늘어났다. 밤 9시30분, 17소초 담당 지역에도 일제히 투광등이 들어왔다. 그러나 수㎞ 밖 북측 지역에선 월봉산 밑자락에 빛이 가물거리다 사라졌을 뿐 내내 캄캄하다.

오전 1시 임무 교대가 있었고 새벽조는 5시반쯤 근무를 마쳤다. 그 즈음 번개부대 연대장 오상헌 대령이 철책으로 왔다. 경계태세가 강화된 시기인 만큼 현장 점검을 강화한다는 의도다. 오전 7시 식당에서 만난 최 중위는 “평소에도 철저히 하지만 요즘은 강도가 더 높다”고 했다. 피곤기가 비치는 최 중위는 곧 자러 가야 된다. 그래 봐야 곧 다시 깨야 한다. 긴장이 격화된 요즘 최 중위의 평균 취침 시간은 5시간 정도. 눈을 비비고 일어나 또 철책 근무를 나가야 한다.

김민석 군사전문기자·안성규 기자 askm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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