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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보다 더 흥겨운, 라디오 스타의 화려한 입담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15호 07면

맑은 얼굴의 MC 유희열(38)이 하얀 피아노 앞에 앉는다. 기타의 아련한 소리가 돋보이는 팻 메스니풍의 퓨전 재즈음악 ‘라디오 천국’이 흐른다. 이 우아한 분위기의 도입부가 끝나자 ‘유희열의 스케치북’의 시작을 알리며 MC가 마이크를 잡는다. 그런데 분위기가 확 깬다. “아무리 꽃미남 열풍이라고 하지만 저까지 부르시다니.”
TV에서는 아직 낯선 얼굴의 이 사내는 자기의 이름이 담긴 심야 음악쇼를 처음 맡고서도 두려움이나 껄끄러움이 없다. 청산유수로 말을 늘어놓고, 게스트 앞에서 비꼬는 유머를 날리며 히히덕거리다 으허허허 하는 웃긴 웃음소리를 마이크에 대고 날린다. 처음 그의 얼굴을 본 사람이었다면 (아마도 그런 사람이 많았을 텐데) 도대체 저 낭만적인 연주 솜씨와 뻔뻔한 말투를 동시에 가진 사람이 누구일지 궁금했을 터. 어쨌든 그는 첫 쇼부터 제대로 안착했다.

KBS-2TV ‘유희열의 스케치북’, 매주 토요일 0시15분

유희열은 제대로 된 ‘라디오 스타’다. 1990년대 신해철의 ‘FM 음악도시’의 2대 DJ로 시작된 자정 무렵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청춘을 보냈던 20~30대 여성들 중에는 ‘최고의 이상형’으로 그를 꼽는 사람이 많다. TV 출연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지만, 그는 라디오에서 감칠맛 나는 말솜씨와 저질스러움을 불사하는 키치 기질, 그리고 ‘디테일에 강하다’는 독특한 감수성을 인정받으며 이미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었던 밤의 황제였다.

라디오에서 TV로 매체가 바뀌었음에도 그의 유연한 말솜씨와 진행 능력은 그대로였다. 아무런 이물감이 없었다. 첫 쇼에서 마치 한 10년쯤은 방송을 했던 사람인 양 능숙하게 출연자들과 유쾌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고품격 라이브 버라이어티’라고 스스로 명명한 프로그램의 성격처럼 이전 이소라나 윤도현, 이하나 등의 진행자들이 이끌 때와는 훨씬 가볍고 유머러스한 분위기가 넘쳐났다. ‘개그콘서트 못지않게 웃어댔다’는 시청자 반응이 넘쳐날 정도다.

자신과 음반 작업을 했던 이승환·김장훈·윤종신, 그리고 평소 친분이 있는 신동엽·이소라·엄정화 등 친하게 지내던 가수가 대거 출연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뻔뻔하면서도 근거가 있는 구체적인 멘트는 확실히 돋보였다. 일류대 출신이라는 배경과 샤프한 외모와는 달리 그는 진지하고 엄숙한 것을 태생적으로 거부하는 기질임이 분명했다.

주류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가수들 외에도 TV에서 역시 보기 힘들었던 언니네 이발관의 첫회 출연이나 지선 등을 등장시켜 균형감각을 찾으려는 점도 돋보였다.
회가 계속되면서 그의 인맥 범위 밖의 사람들이 등장하면 달라질지도 모르겠지만 4회까지 방영된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가수이자 작곡가에 입담 좋은 유희열이 이끌어 가는 흥미로운 음악토크쇼가 될 것 같은 예감이다. 음악적인 애정이 넘쳐나지 않으면 졸음을 참기 힘든 심야의 라이브 쇼를 음악적인 진지함 외에 수다와 웃음까지 끌어들여 무게를 훨씬 가볍게 만들 능력이 유희열에게는 있다.

하지만 그 음악적인 진지함이 좋고 라이브 음악으로만 채우기에도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골수 음악팬들에게는 이 심야쇼의 변신은 약간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이름만 달라졌을 뿐 음악적인 변화는 그다지 없어 보이는 이 쇼가 눈에 띈 점이 진행자의 말발과 유머 감각밖에 없다는 점도 아쉽다. 다수의 환호와 박수 속에 출발한 ‘유희열의 스케치북’이 신선한 음악인들을 발굴해내고,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소화해내는 유희열의 음악적인 강점을 잘 살려내 말뿐 아니라 음악으로도 돋보이는 쇼로 발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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