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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간 바꾸는 주식 30%도 안 돼…최소 3년 장기투자가 원칙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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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호 28면

“(좋은 주식을) 사서 그냥 깔고 앉았죠.”
미국의 글로벌 금융회사인 라자드의 펀드매니저 존 리(51·한국명 이정복·사진) 전무는 최근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과거 고수익을 냈던 코리아펀드의 비결을 이렇게 밝혔다. 코리아펀드는 외국인의 국내 주식 투자가 허용되지 않던 1984년 한국 정부의 허가를 받고 설정된 첫 외국인 펀드였다. 미국인 투자자만을 대상으로 한 폐쇄형 펀드였다. 이 전무는 91년부터 2005년까지 스커더와 도이치투신운용에서 이 펀드를 운용하며 펀드 규모를 1억5000만 달러에서 14억 달러로 키웠다. 그는 “1년에 보유 주식의 10%도 바꾸지 않을 정도로 매매를 자주 하지 않았지만 연간 펀드 수익률은 시장수익률보다 9%포인트 높았다”고 말했다.

1억5000만→14억 달러로 펀드 규모 불렸던 존 리 美 라자드 전무

이 전무가 현재 라자드에서 운용하고 있는 한국기업지배구조펀드(KCGF·Korea Corporate Governance Fund)에서도 ‘엉덩이 무거운’ 그의 투자철학을 읽을 수 있다. “1년에 바뀌는 주식은 전체의 30%가 채 안 된다. 평균 3~5년의 장기 투자를 하는 셈이다.”

서울 태평로1가 서울파이낸스센터에 사무실을 둔 라자드코리아자산운용의 한국투자팀엔 이 전무가 코리아펀드를 운용하던 스커더 시절부터 10년 이상 고락을 함께한 이들이 여럿이다. 이 전무는 “우리 모두 장기 투자라는 투자철학을 공유하고 있다”며 “단기 실적을 따지는 다른 회사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끼리 똘똘 뭉치게 된 것”이라고 했다.

이 전무는 ‘장기 투자’ ‘펀더멘털(기본) 중시’ 등 교과서 같은 말을 자주 했다. 이미 개인투자자에게조차 익숙한 말들이다. 하지만 그는 “말은 쉽지만 실제로 지키기는 힘든 원칙”이라고 했다.

시원찮은 경기 움직임에도 불안하게 내달리고 있는 요즘 한국 증시에 대한 견해를 묻자 그는 ‘시장’이 아니라 ‘종목’에만 관심 있다고 했다. “우리는 증시 흐름을 보면서 주식을 사고파는 ‘마켓 타이밍’을 하지 않는다. 주가지수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주식을 팔고 사는 시점은 신(神)만이 알기에 마켓 타이밍으론 돈 벌기 힘들다. 거시경제 변수도 별로 중요시하지 않는다. 우리 주식운용팀에는 이코노미스트가 없다. 거시경제 변수부터 따지는 게 아니라 기업부터 고르는 상향식(bottom-up) 분석으로 종목을 고를 뿐이다. 그래서 기업 방문을 많이 한다. 시장에 흔들리지 않는 독립적인 의견을 갖는 게 중요하다. 주가가 폭락했던 지난해 하반기의 주식 매매량이 그해 상반기와 비교해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다.”

증시에 대한 라자드의 시각은 어떨까. 라자드 본사 홈페이지의 최근 자료 ‘변화하는 미국 증시의 모습’은 미 증시를 비교적 낙관적으로 그리고 있었다. 주택시장과 빚 줄이기(디레버리징), 재정·금융정책을 통한 정부 개입의 결과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남아 있지만 이제 폭락장은 끝난 것 같고 시장이 정상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미국 주식을 사면) 투자자들이 과도한 위험을 부담하지 않고도 상당한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했다.

라자드는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둔 글로벌 금융회사로 1848년 설립됐다. 3월 말 기준으로 세계 각국에 2307명의 임직원을 두고 811억 달러의 자산을 굴린다. 금융위기 여파로 운용자산 규모는 2007년 말(1414억 달러)보다 줄었지만 지난해 16억8000만 달러의 영업수익을 올렸다. 사업부문은 크게 금융자문과 자산운용으로 나뉜다. 한국에 진출한 부문은 자산운용 쪽이다. 라자드는 2005년 한국 사무소를 열면서 일임투자자문회사로 등록했고, 지난해 6월엔 자산운용업 인가를 받았다. 한국 시장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것은 2006년 일명 ‘장하성 펀드’로 알려진 KCGF를 발족하면서부터다. 기업지배구조펀드는 투자 회사의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해 주식가치를 높이는 게 목적이다. 소액주주 운동가로 유명한 고려대 장하성 교수가 이 펀드의 고문 역할을 맡고 있으며,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CGCG)와도 협력하고 있다.

-‘장하성 펀드’로 알려진 KCGF는 실제 누가 운용하나.
“펀드매니저는 나다. 회사의 가치가 싼지 비싼지를 중심으로 내가 검토한다. 그런 뒤 회사의 기업 지배구조에 개선의 여지가 있는지 장 교수의 조언을 듣는다. 대주주가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은 회사는 아예 제외한다.”

-어떤 주식을 선호하나.
“(내재가치에 비해) 디스카운트가 많이 돼 있어야 한다. 기업 지배구조 측면에서 개선의 여지도 있어야 한다. 주로 중견기업에 투자한다. 펀드에 현금을 따로 남겨두지 않고 전액을 주식에 투자한다.”

-기업지배구조펀드의 운용 규모와 보유 종목은.
“규정상 말할 수 없다.”

-펀드 실적은 어떤가.
“사모(私募)펀드여서 공개할 수 없다.”
이 전무와의 인터뷰 자리에는 라자드의 준법감시인이 배석했다. 이 전무와 준법감시인은 펀드 규모나 개별 종목에 대한 언급을 극도로 자제했다. 시장에 의도하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간접적으로나마 몇 가지 정보를 파악할 수는 있다. 최근 KCGF가 금융감독원에 신고한 내용에 따르면 지난해 4월 말 기준으로 이 펀드의 자산 규모는 2억9430만 달러다. 요즘 환율로 따지면 3670억원 정도다. 5% 이상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거나 보유했었던 종목도 금감원 자료로 알 수 있다. 현재 대한제분(8.6%이하 보유지분율)을 비롯해 대한화섬(9.1%)·삼양제넥스(9.6%)·에스에프에이(10.9%)·크라운제과(7.9%)·한국전기초자(6.1%)·현대H&S(7.3%)에 투자하고 있다. 지분 일부를 팔았지만 대상홀딩스(1.8%)·동원개발(4.97%)·벽산건설(4.1%) 등도 보유 중이다.

-라자드 본사 홈페이지를 보니 기업 지배구조 투자전략에 관한 얘기는 눈에 띄지 않는다. 한국에서만 그런 전략으로 투자하나.
“다른 시장에서 많이 하지는 않는다. 한국 자본시장이 비효율적이어서 투자 기회가 많다고 본다. 기업 내재가치와 주가의 차이(밸류에이션 갭)가 크다. 말도 안 될 정도로 비싼 주식이 있는가 하면, 매우 저평가된 주식도 많다. 게다가 한국 주주들은 변화에 대한 수용성이 높고 역동적이다.”

-자본시장이 문제가 많다고 보나.
“한국엔 제대로 된 리서치가 없다. ‘살 때다’ 혹은 ‘팔 때다’고 주장하는 얄팍한 보고서가 많다. 시가총액 상위 50개 종목을 벗어나면 읽을 만한 보고서를 찾기 힘들다.”

-KCGF 발족 초기에는 태광그룹·벽산건설 등 투자기업과의 갈등이 적지 않았다. 올해 주총은 별다른 뉴스 없이 조용히 지나갔는데.
“투자한 기업과 우호적인(friendly) 방식으로 기업 지배구조의 개선을 꾀하는 게 원칙이다. 그동안 한국 기업의 ‘학습효과’도 있었던 것 같다. 우리 요구가 결국 회사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일부 회사와 이견이 있었지만 결국 합의했다. 투자한 회사도 많이 달라졌다. 투자한 기업 중에는 기업 탐방을 허용하지 않은 곳도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해외 기업설명회(IR)까지 나간 회사도 있다.”

‘기업지배구조펀드’ 하면 흔히 소버린을 떠올린다. 모나코 국적의 자산운용회사인 소버린은 2003년 SK㈜의 경영권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8000억원이 넘는 수익을 챙기고 철수해 ‘먹튀’ 논란을 불렀다. 이 전무는 “라자드는 앞으로도 한국 시장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소버린과는 다르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주주 활동주의(액티비스트)를 표방하는 펀드와 달리, 라자드는 평판(reputation)을 중시한다”고도 했다.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을 요구하는 외국인 투자자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주주의 정당한 권리 행사로 볼 수도 있지만 회사의 투자 여력을 막아 성장동력을 갉아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전무는 이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투자를 안 하고 현금을 들고 있거나 잘못된 투자를 하는 게 자본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건가. 그 돈으로 배당을 받아 주주들이 더 효율적인 곳에 투자하도록 하는 게 사회적으로도 바람직하다. 결국 자기자본이익률(ROE·순이익을 자기자본으로 나눈 뒤 100을 곱한 수치)이라는 잣대가 중요하다. ROE가 20%인 회사가 30%의 이익이 예상되는 곳에 투자한다면 왜 반대하겠나. 현금을 많이 보유해 ROE가 낮은 한국 기업이 너무 많다. 그건 국가적으로도 손실이다.”

라자드코리아자산운용은 지난해 10월 일반 투자자를 대상으로 하는 공모펀드를 시작했다. 다른 자산운용사에서 수천억원 규모의 적립식 펀드를 운용하던 고희탁 펀드매니저가 라자드에 합류해 이 펀드를 굴린다. 펀드 설정액은 57억원으로 아직 많지 않지만 규모에 연연해하지는 않는다. 이 전무는 “좋은 실적을 내면 자연스레 입소문이 날 것”이라며 “코리아펀드의 명성을 재현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 고객을 동일하게 대우하는 차원에서 공모펀드를 많이 만들지 않을 것”이라며 “투자 성격이 다른 펀드를 한두 개 더 만들 수는 있겠지만 향후 5년 내 국내 주식에 투자하는 공모펀드가 세 개 이상 나오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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