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도 기업도 '부실' 가속화…장기 복합 불황 우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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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사진관을 운영하는 김인호 (서울 정릉동.36) 씨는 1년 전에 산 5층짜리 상가주택 때문에 요즘 밤잠을 못 이룬다.

지난해말만 해도 이 건물에서 월 3백만원의 임대수입을 올렸으나 요즘은 반대로 70여만원씩 생돈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세입자가 줄고 임대료도 떨어진 반면 금리는 올라 집 살 때 빌린 은행대출금 이자도 안나오는 형편이다.

한때 10억원을 호가하던 건물을 절반에 내놨지만 팔릴 기미도 안 보인다.

서울 여의도의 주부 李모 (54) 씨는 지난해 11월 자기돈 5천만원에 증권사 신용 5천만원 등 1억원을 주식에 투자했다가 원금은 고사하고 4천만원의 빚만 지게 됐다.

이처럼 부동산.주가가 떨어지면서 자산 디플레이션현상 (경기 불황으로 자산 가치가 떨어지는 것) 이 위험 수위에 이르고 있다.

기업.가계.금융권의 자산이 앉은 자리에서 뭉텅이로 날아가면서 외환위기로 인한 경기후퇴가 자칫 장기 복합불황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부동산가격과 주가 하락이 기업 구조조정의 발목을 잡고 가계의 소득감소를 가져와 소비와 투자를 위축시키고, 이것이 다시 불황의 골을 깊게 파는 악순환이 빚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또 자산가치 하락은 각 경제주체들의 자산운용 계획에 차질을 가져와 대출금을 제때 갚지 못하거나 이자를 연체하는 등 금융권의 부실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이미 가계쪽에서는 금융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연체에 걸린 사람들이 급증하기 시작했고, 기업들은 구조조정을 위해 내놓은 수십조원의 부동산이 팔리지 않아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이러다간 개인파산과 기업의 연쇄부도가 봇물 터지듯 밀어닥칠 우려도 있다.

일본의 경우 거품이 꺼지면서 부동산값이 폭락하는 바람에 이를 담보로 대출해 줬던 금융기관들이 부실화하고, 다시 대출감소→기업부도→불황→자산디플레이션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겪었다.

대우경제연구소 신후식 연구위원은 "시가보다 많이 대출해 준 일본과 달리 한국은 절반 정도만 담보로 잡았기 때문에 일본 같은 사태가 발생하지는 않을 것"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장의 인식은 심각하다.

LG그룹 회장실 재무팀 정도현부장은 "부동산이 계속 안 팔리면 기업 자구노력이 허사가 되고, 이 때문에 금융기관 부실이 해결되지 않으면 복합불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고 말했다.

포스코 경영연구소 곽창호 경제분석팀장도 "한국은 고금리.고환율과 자산디플레이션이 동시에 나타나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면서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금융기관.기업 구조조정을 가속화하는 한편 경기를 되살려야 할 것" 이라고 말했다.

시중은행의 한 임원은 "부동산 가격 폭락을 막기 위해 정부가 추진중인 재금융공사 (가칭) 를 통해 부실채권을 매입하고 부동산을 증권화해 꽉 막힌 부동산시장의 숨통을 열어주는 것이 시급하다" 고 지적했다.

최영진.이정재.유상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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