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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호의 뉴욕 읽기]산토리니 마을이 그립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9면

어떤 사람은 미국을 '자유' 의 나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사람의 행동을 구속하는 자잘한 법과 규제가 미국처럼 많은 나라도 없다.생활 속에서 쉽게 접하는 술.담배.약품의 유통과정과 사용방식을 한국과 비교해보면 한국이 얼마나 '자유' 의 땅인지 단번에 알 수 있다.

한국에 비해 미국이 얼마나 '자유' 롭지 못한 나라인지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는 거리의 간판이다.제 집 간판 매달기가 특히 힘든 곳이 미국이다.

간판에 대한 규제가 얼마나 심한지, 단지 간판 때문에 몇 개월간 영업을 못하는 음식점을 본 일도 있다.

뉴욕의 타임스 스퀘어나 라스베이거스 등 경쟁적으로 번쩍거리는 일부 지역을 미국 도시의 인상으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곳은 그런 간판을 허용하거나 권장하기로 한 특수 지역이다.

대부분의 지역에선 네온의 사용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다.

도대체 돌출간판 (건물벽으로부터 튀어나와 행인의 시선과 90도 각으로 마주치게 만든 간판) 이 허용되지 않는다.크게 제한된 크기와 색깔로나마 허용되는 곳은 병원과 주차장뿐이다.

어떤 지역에선 깃발 (banner) 처럼 천에 글씨를 쓴 것만을 허용한다.

물론 그 색도 한두 가지로 제한돼 있다.그러나 사람 사는 곳이라면 으레 그렇듯 위와 같은 조정과 규제가 못미치는 지역이 있다.

그런 곳을 슬럼이라고 한다.

어느 거리가 '슬럼가' 라고 판단됐다면, 그 거리의 간판들이 거기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어느 도시, 어느 마을이 아늑하고 평화롭게 느껴졌다면 그 인상은 주로 건물과 간판들이 형성한 것이다.

미국의 경우 간판은 철저히 지방자치 행정의 소관 사항이다.

바로 자기 마을이기 때문에 아름답게 만들려 애쓴다.

그러다 보면 좀더 '튀려는' 상점 주인과 시 (市) 의 갈등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원칙을 갖고 밀고 나간다.

그 원칙은 매우 구체적이다.'간판의 배경은 진초록.진갈색만 허용됨. 글씨는 신명조체와 고딕체만, 색은 흰색이나 황금색만, 크기는 12인치 이하. 자체 발광 불가…. ' 이처럼 구체적이기 때문에 달리 빠져나갈 여지가 없다.

그리고 사전 심사를 통해 이웃 건물과 간판의 조화를 유도한다.어떤 타운에선 건물 외벽을 새로 단장하거나 간판을 바꾸면 그 비용의 25~50%를 보조한다.

이처럼 자기가 사는 마을의 외모.인상 가꾸기에 집착한다.

그 결과 살벌하고 썰렁한 신도시가 아니라,가서 안기고 싶은 아늑한 마을이 태어난다.

또한 특정 재료와 색을 선택하여 마을마다 자기 특색을 가질 수 있다.

그리스의 산토리니라는 해변 마을은 그 마을의 자연특산물인 바다와 하늘의 색 (로열 블루) , 해변의 모래색 (베이지) , 그리고 흰색만으로 모든 외벽이 칠해져 있다.

상상해 보라. 기하학적이 아닌, 손바닥으로 버무린 듯한 베이지색 벽에 눈이 아리도록 짙은 푸른 색 창틀과 문. 그 숨막히는 색깔 대비. 그 특이한 풍경은 그 마을을 잠시 스친 사람에게도 사랑의 상처처럼 가슴에 오래 머문다.

횟집 간판들이 난투극을 벌이는 해변을 걸을 때는 어서 취해버리고만 싶던 사람도, 산토리니 해변에 서면 한동안 풍경만을 바라보며 서있게 될 것이다.

뉴욕에서=이태호<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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