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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 징후인가…음모이론 득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6면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당혹스럽다.

안기부가 북한과 '북풍' 을 놓고 거래를 했다니. 전 안기부장은 왜 칼로 배를 그었는지 아리송하고, '흑금성' '이스턴 사업' 따위의 심상치 않은 낱말은 무엇이며, '파일' 은 뭐 그리 많은지…. 어디선가 냄새가 난다.

잘 알 수는 없지만 거대한 세력들이 모종의 힘겨루기를 벌인다는 의심 같은 것. 만약 그런 느낌이 온다면 당신도 음모이론의 세계로 한 발 내디딘 셈이다.

음모이론 (Conspiracy Theory) .최근 이런 제목을 가진 영화가 나올 정도로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우리 눈앞에 진실이라고 나타나는 것 뒤편에 '진실한 진실' 이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만들어나가는 일종의 가설이다. 대학의 연구과제로 등장할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아다시피 음모이론은 이런저런 문제로 진실을 밝혀내기 어렵거나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건을 설명하는데 주로 사용돼왔다.

존 F.케네디 미국 대통령 암살사건은 전자에 속한다.

공식 발표는 오스왈드의 단독 범행이라는 것이었으나 현재는 닉슨이나 극우보수파와 군수자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케네디를 제거했다는 음모이론이 득세하고 있다.

UFO 및 외계인과 관련된 음모이론은 후자의 경우다.

UFO 연구자들은 미국이 오래전부터 외계인과 접촉을 해왔으며 스텔스 (레이더망에 걸리지 않는 기술) 와 같은 군사기술을 이들로부터 얻어왔다고 주장한다.

이외에도 미 CIA의 마약거래설, 영국 왕실의 사주에 의한 다이애나 사망설, 화학무기 개발 과정에서 AIDS가 발생했다는 주장 등을 비롯, 엘비스 프레슬리.마릴린 먼로.존 레넌.커트 코베인 등 스타들의 사망과 관련한 온갖 음모설이 난무하고 있다.

클린턴의 여성추문이 보수파가 꾸민 공작이라는 주장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이같은 음모이론은 나름의 치밀한 논리와 정황 증거를 제시하고 있어 단지 '썰' 로 받아들이기에는 미심쩍은 구석이 많다.

우리의 경우도 최근 북풍에서부터 김일성 사망, 김형욱 실종, 박정희.장준하.신익희.김구 등의 암살의혹, 오대양 사건 등 아직 명쾌히 풀리지 않은 사건들은 음모이론의 소재가 되기에 충분하다.

이 대열에는 황당한 '음모' 도 끼어있다.

북한과 중국이 3차세계대전을 꾸미고 있다거나 지구가 실제로는 평평한데도 과학자들은 이를 은폐중이라는 말도 있다.

심지어 미국정부가 하늘을 나는 코끼리를 기르면서도 공개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다.

지난해 화제 영화 '맨 인 블랙' 을 보면 상당수 유명인들의 정체가 외계인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실제로 50~60년대 미국에서는 검은 옷에 검은 안경을 낀 소속을 알 수 없는 요원들이 UFO를 목격했다는 사람들을 만나 발설하지 말 것을 협박했다고 한다) . 전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TV시리즈 'X파일' 의 경우에서 보듯 음모이론이 펼쳐내는 세계는 세기말의 심리적 불안감과 맞물려 대단한 흥미를 유발한다.

또한 소화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보가 폭증하는 시대에 일반인들에게 '알지 못하고 넘어간 무언가가 있다' 는 의혹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민감한 사안에 관한 기록이 비밀로 부쳐져 있다는 점은 음모설의 주된 근거가 되기도 한다.

하긴 유달리 비밀도 많고 의혹도 많은 우리의 현실을 고려하면 더 많은 음모이론이 만들어지지 않는 게 오히려 신기하다.

대신 출처를 알 수 없고 근거도 부족한 유언비어만 떠돌 뿐이다.

혹시 그동안 진실을 찾는 노력이 권력에 의해 탄압 받아왔기 때문은 아닌가.

채규진.문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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