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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아라리 난장 7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우리들이 지나온 고개이름이 소나기재예요. 단종임금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가 죽음을 당한 건 아시죠? 그 후에 조정의 높은 대신들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단종임금의 묘소를 찾아 영월로 찾아오는 길에 이 고개를 넘을 때마다 난데없는 소나기가 내렸다고 해요. 그것은 단종임금의 원혼이 소나기를 뿌렸다 해서 나중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인가 봐요. " 내리막길을 내려가면서 태호가 들려준 말이었다.

그들은 곧장 문곡리의 삼거리에 당도했다.

농공단지 앞을 지나서 농협 앞에 이르자, 다시 세 갈래 길이 나타났는데, 정선으로 가는 도로와 평창으로 가는 도로가 시원스럽게 뚫려 있었다.

그 곳에서 평창 가는 길로 들어서자, 머지않아 성황동이 나타났고 곧장 원동재를 넘어야 했다.

원동재는 가파르지는 않았지만, 굴곡이 심한 고개였다.

고개를 넘자 곧장 용봉이란 마을이 나타났고, 그 곳에서 다시 원주와 주천에 당도하는 도로가 나타났다.

도돈교라는 다리를 건넜을 때, 왼편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나타났고, 오른쪽으로 제법 큰 강이 질펀하게 깔리기 시작했다.

강 건너 마을이 천동이었다.

도로와 천동 사이를 흐르는 강이 바로 평창강이었는데, 강가에는 갈대가 무성했다.

이수로 70여리를 달려 왔는데도 달은 내내 그들을 뒤따랐다.

그들이 차를 달리면 지체없이 뒤쫓아 왔고 그들이 차를 멈추면, 시치미를 뚝 떼고 중천에 머물러 있었다.

사뭇 달을 흘깃거리던 태호는 갈대밭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속도를 줄이는가 했더니 갓길에다 차를 멈추었다.

그때까지도 앞서간 봉환의 차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태호가 먼저 운전석을 내려가며 말했다.

"선배님. 우리 달구경 실컷 하고 떠날까요? 이젠 밤공기도 그다지 춥지 않네요. " "달이 평창까지 우릴 놓치지 않고 뒤따라 올 텐데…. " "하지만 갈대밭 위로 걸려 있는 달은 운치가 하늘 가운데 마냥 떠 있는 달과 비교할바가 아니던데요. 작년 여름부터 한 달에 두 번 정도 이 길을 거르지 않고 다녔거든요. 가을이 가까워지면, 좁은 개활지가 비좁도록 들어선 갈대가 사람의 키를 넘기도록 자라서 연자주색 꽃들이 흐드러져요. 한 번은 오늘 밤처럼 차를 저기쯤 세워두고 갈대밭 속으로 들어가 누워 갈꽃 사이로 떠다니는 달구경을 했었어요. 밤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갈꽃이 흡사 빗자루처럼 달의 이마를 쓸어주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정도였어요. 갈꽃이 달의 이마를 스쳐갈 적마다 달빛이 더욱 밝아졌으니까요. 동화책에서나 나올 이야기죠. 그러다가 거짓말처럼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것 같아요. 추위에 떨다가 눈을 떠보니 달은 어느새 숨어버리고 캄캄한 새벽 5시였어요. 잠은 추위 때문에 깬 것 같은데, 갑자기 무서워지기 시작했죠. 막 떨려오면서 무서워졌어요. 짐승을 만날까봐 무서웠던 게 아니구요. 사람을 만날까봐 무서웠지요. 사방을 둘러봐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사람을 두고 그렇게 무서워했던 것도 난생 처음 경험한 일이었죠. 그러나 그때, 하룻밤의 경험 때문에 영월에서 평창으로 가는 이 밤길을 버릴 수가 없었죠.

"그런데…. 한 가지 얘기 빠뜨린 것 같군. 비약인지는 모르지만 그때가 여름이었다면, 태호는 젊은 사람이니까, 분명 달을 쳐다보며 혼자서 섹스 같은 것 즐기지나 않았을까? 우리가 달을 바라보노라면, 피곤하지 않아도 왜 풀밭 위에 눕고 싶어지는 걸까?

눕고싶다는 욕구는 어째서 유독 달하고만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선팅을 하지 않으면, 피부에 곰팡이가 피는 것 때문에 서양사람들은 해만 봤다 하면 곧잘 누워서 해바라기를 해야 하지만, 우린 해보다 달을 보면 눕고싶거든?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어?" "글쎄요. 달의 의미에 대해선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요. 하지만 몇 시간이고 쳐다보는 것은 싫증이 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눕고싶었던 게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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